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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퇴직유랑기 #22. 런던에서의 마지막 밤

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by 봄단풍

밖에 나오니 또 다시 비가 내릴 듯 말 듯한 흐린 날씨가 이어지고 있었다. Watford Junction 으로 가는 셔틀버스에 우연히 빠르게 탑승하게 됐는데, 이 때는 2층의 맨 앞에 앉을 수 있었다! 런던 근교의 한산한 풍경을 커다란 전면 스크린으로 보는 느낌이었다. 너른 풀밭과 간간이 보이는 공장들, 성냥갑만한 작은 집들. 역시나 근교임에도 불구하고 도로는 좁았지만 차들은 특별한 정체없이 잘 다니고 있었다. 신기했다.


Watford Junction에서 탄 열차는 운 좋게도 Euston 역까지의 직행열차였다! 올 때는 한 시간 가량 걸렸던 거리를 15분만에 주파하고 나니 묘한 허무감도 들었다. 뭐, 계획대로 안 되는 것이 또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어.




런던 시내에는 펍(Pub)이 참 많았다. 그 많은 펍들 중 한 곳을 고르기 어려웠던 건, 가게마다 분위기가 굉장히 상이했다는 거다! 일례로 숙소에서 가까웠던 Lexington이라는 펍은, 분명 밝을 때에는 의자가 정갈하게 놓여진, 레스토랑을 연상케하는 조용한 펍이었지만 해가 진 다음에는 무려 락 클럽으로 변모해있었다. 어두컴컴한 실내는 물론이고 쿵짝거리는 비트가 귀가 아닌 벽과 바닥을 통해 온 몸으로 느껴지는, 골목 한 귀퉁이에는 열 댓명가량 줄을 서서 그 비트에 몸을 흔들고 있는 펍. 타지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맥주를 즐기기에는 어려워보였다.


결국 이십분 정도 킹스 크로스 역 주위를 배회하다가, 가장 깔끔한 느낌의 펍을 들어갔다. 이름이 펍이었지 셜록홈즈 박물관에서 봤던 느낌의 메이드 복을 한 웨이트리스 분들이 서빙을 하는, 레스토랑에 좀 더 가까운 곳이었다. 혼자서 조용히 맥주를 홀짝이는 손님부터, 대여섯명이 함께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손님까지. 다양한 손님이 모인 그 곳에서, 우리는 두명자리 치고 꽤 넓은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드디어 그렇게도 궁금했던 피시 앤 칩스를 즐기기 위해. 영국요리의 대표격이자, 맛없음의 대표이기 도 한 그 요리를. 두근거렸다. 혹시나 피시 앤 칩스가 정말 그 명성에 걸맞을 경우를 위해, 탈출구이자 보험용으로 닭 가슴살 스테이크를 함께 주문했다. 맥주의 종류도 참 다양했는데 한국에서와 달리 이름을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종업원께 추천을 부탁드렸다. 하지만 정작 그 분도 추천해달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처음인지 무심히 ‘뭐 다 똑같아요’ 라고 하시길래, 약 5%대의 알콜 농도만 기억나는 녀석을 한 잔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적당히 걸린 듯 했다. 적당히란, 서울보다는 확실히 여유있게 준비를 하는 듯 했으며 처음보는 사람과 서로 할 얘기를 대충 다 하고 어색어색해질 때 쯤 음식이 나왔다는 이야기이다. 시간으로 따지면 20분에서 3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막상 계산해보고 나니, 두 가지 음식과 술을 준비하는 데에는 나름 신속하게 나온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나조차도 늘 여유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면서 정작 다른 사람의 행동에는 관대해지지 못한 탓인지도 몰랐다.


과연 여러 가지 의미로 음식의 강국이었던 것일까. 나온 두가지 요리의 비주얼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분명 조리를 한 것 같지만 묘하게 성의가 담기지 않은 듯한 느낌. 피시 앤 칩스부터 보면, 생각보다 반찬들이 많았다! 설탕물에 절인듯한 초록색 완두콩이 한 주먹 정도 나왔고, 손가락 굵기정도 되는 감자튀김도 접시 바닥을 그득히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피쉬로 추정되는, 생선모양의 생선튀김이 놓여져 있었는데……. 생선 한 마리를 기절시켜서 통째로 튀겨놓은 듯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튀김옷의 속은 순살이었다! 가시와 뼈를 발라낸 생선 속살을 생선모양으로 조립(?)하거나, 혹은 뼈만 기술적으로 발라낸 뒤에 한번에 튀겨낸 모양이었다. 튀김 옷은 두껍고 속살과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살짝 눅눅했지만 생각보다 맛있었다. 닭가슴살 스테이크는 흔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파는 것과 다르지 않았는데, 통감자와 완두콩이 역시나 같이 나왔다.


전반적으로 맛은 만족스러웠다. 통째로 튀긴듯한 커다란 생선튀김에는 얇은 가시가 하나도 나오지 않았고, 완두콩은 달달했다. 닭가슴살은 원래 퍽퍽하지만 소스가 넉넉하게 나와서 먹을만 했다. 다만 머스타드는 우리나라에서처럼 달지 않고, 매운 맛이 훨씬 강했다! 혀가 얼얼한 매콤한 맛이 아니라, 코가 시원칼칼한 일본의 고추냉이의 느낌에 더 가까웠다.


몰랐던 사람과 한층 더 가까워지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안주였다. 둘 다 맥주 한 잔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서로의 인생이야기에서 연애이야기로 번졌고, 때로는 공감이, 때로는 위로가 오고가며 훈훈한 공기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분의 외모도 참 훈훈했다. 나이는 두 살 어린데도 키는 나보다 머리 하나 정도 더 컸고, 자연스러운 미소도 참 보기 좋았다.


그 분은 나와는 반대로, 파리에서 넘어왔다고 했다. 나는 파리로 넘어갈 예정이라고 하니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일러주셨다. 단순히 슥 채가는 사람만 있는게 아니라, 팔찌를 억지로 채우고 강매를 하는 사람, 설문조사나 앙케이트를 한다면서 일행이 채가는 사람 등등 다양한 전략이 이용된다고. 자기도 한 두 번 마주쳤지만 무시하고 열심히 걸어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며, 경계는 해도 큰 걱정은 할 필요 없다고 일러주셨다.


“몽마르뜨 언덕 근처가 제일 심해요. 거기 길목이 어두컴컴하고 그래서.”


몽마르뜨 언덕.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단순히 이름이 아니라 여행을 준비하다가 들은 것 같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파리의 숙소를 체크해봤다. 몽마르뜨 언덕에서 십분 거리입니다, 라는 안내문구가 자랑처럼 박혀있었다. 원 세상에. 잘못하다간 이 분이 심하다고 했던 거리를 파리에 체류하는 내내 돌아다니게 될지도 몰랐다.


“근데 그렇게 막 무섭지는 않아요. 그냥 단호하게 딱, 무시하고 걸어가면 별 일 없어요.”

“막 기차나 버스에서도 짐 가지고 도망가는 사람 많다던데?”

“그건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전 자물쇠도 안 채우고 그냥 다녔는데 아무 일 없었는데. 사람마다 다른 거죠. 운이기도 하고. 근데 웬만해서는 별 일 없으니 걱정 안하셔도 돼요.”


속으로는 별일 아니겠지 하면서도 어느새 그 분에게는 자세히 물어보고 있었다. 그래 뭐 별 일 있겠어. 경계만 잘하면 되지. 나도 모르게 남방 안으로 멘 여행자용 가방을 꼭 움켜쥐며, 남은 맥주를 한 번에 털어넣었다.


내일 일정을 위해 들어가다가, 그분도 내일 낮에 유로스타를 탄다고 하길래 같이 타기로 했다. 물론 나는 파리행, 그 분은 벨기에 행이었다. 시간은 한 시간 정도 차이가 났지만 같이 역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여행중에 동행이 생기는 건 생각보다 참 든든한 일이었다. 어설픈 영어로 여기저기 들이대 볼 용기가 생기기도 했고.


게스트 하우스에 돌아오니, 같은 방을 쓰는 사람들은 아직도 들어오지 않았다. 서 너 명이 함께 놀러온 의대생이라고 들었는데, 밤까지 클럽에서 놀다가 들어온다고 했단다. 대단한 젊음과 열정이구나. 사실 나도 분명 사회에서는 어린 축에 속하긴 했지만, 그래서 클럽도 가보고 싶었지만 - 런던에 혼자 있던 그 때는 굉장히 무서웠다. 겁이 많았고, 유흥보다는 풍경과 경치가 더 감동적으로 느껴지는 사람이었기에 혼자 조용히 잘 수 있음에 감사하며 자리에 누웠다.


여러 가지 생각이 오고갔다. 이렇게 첫 번째 도시가 지나가는구나. 길기만 할 것 같던 한 달의 일정 중에 벌써 1악장이 마무리되는 셈이다. 대영박물관, 셜록홈즈 박물관, 햄리스 장난감 가게와 여러 공원, 해리포터 스튜디오. 그리고 오랜 시간 걸어다니며 둘러보았던 런던의 거리들, 행인들, 그리고 낯설게만 느껴졌던 차들까지. 나는 후회없이 여행을 했을까, 미련없이 이 곳을 떠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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