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많은 퇴직자의 유럽 5개국 8도시 여행기
곳곳에 진열된 소품들의 매력은, 영화에 나오는 그대로의 소품들도 있을 뿐만아니라, 제작과정도 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괴물들의 박제들도 볼 수 있었고, 손을 깨무는 책들, 그리고 사람들이 직접 입거나 그렸던 분장들도 볼 수 있었다. 또한, 책에 나오는 각종 구조물들을 미니어쳐로 옮길 때 이용했던 설계 도면까지도 볼 수 있었다! 어딜 가든 한 쪽에서는 늘 색다른 곳에서 만드는 과정을 영상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박물관 안에는 킹스크로스역 9와 3/4번 승강장도 있었다. 그것도 영화에 나온 그 모습 통째로! 미니어쳐도, CG도 아닌 거대한 역과 호그와트행 기차가 만들어져 있었다. 벽마다 딱 반만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나머지는 벽 속에 숨겨진 가방 가득한 카트가 밀어볼 수 있게 전시되어 있었고, 누구나 손을 대거나 올라탄 채로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설렜던 건 기차를 타볼 수 있었는데, 자리에 앉아 볼 수는 없었지만 기차 칸마다 등장인물들을 유추할 수 있는 소지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루핀 교수의 가방이나 신문이라든지, 새장이라든지.
두시간 반을 좀 넘게 돌아봤을까, 마침내 마지막 공간으로 올 수 있었는데, 그 곳의 위용은 실로 굉장했다. 거대한 호그와트 건물, 성과 각 기숙사와 안 뜰까지를 미니어쳐로 만들어놓은 방이었다. 실제 건물에 비하면 당연히 작겠지만 그 크기 자체는 미니라고 부르기 아까울 정도였다. 두 층에 걸쳐서 설치되어 있었으니……. 작은 고래 한 마리 정도의 크기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영화에 직접 사용했던 것인 듯, 밖에서 잘 보이지 않는 건물 안쪽에도 다양한 장식은 물론 벽돌 하나하나까지 정성스레 구현되어 있었다.
그리고 관람은 바로 기념품 가게로 이어졌다. 중간에 딱 하나의 방을 더 남겨두고.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방에,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상자들이 벽과 찬장마다 가득한 방이었다. 바로 마법사의 증표이자 생활용품이나 다름없는 마술지팡이 방이었는데, 어쩐지 그 방에 설치된 상자들은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보이는 작은 면마다 왠지 낯선 이름들이 적혀있었다. 어쩌면, 해리포터 시리즈를 그 오랜시간 함께 해온 스탭들의 이름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만약에 그게 맞다면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다! 영화나 드라마를 비롯, 뮤지컬을 포함한 극 예술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엔딩 크레딧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었다. 하나의 작품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손을 거쳐서 만들어진다. 감독와 주연, 조연 배우들뿐만 아니라, 시나리오, 조명, 카메라, 투자자들 까지. 시나리오의 한 신만 해도 여러 사람의 퇴고가 거쳐가고, 조명 각도와 세기, 색채 하나에도 수없이 많은 시도가 수반된다. 문제는, 그런 수고를 작품에서는 일일이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거다.
뮤지컬과 오페라는 커튼 콜이 있지만 그마저도 배우들, 잘 해봐야 감독까지다. 영화나 드라마는 엔딩 후에 크레딧을 올리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이 그 전에 나가버린다. 최근에는 예고나 쿠키영상을 통해 사람들의 발을 잡아두고 있지만, 그것도 시리즈물이나 가능한 일이다. 애초에 쿠키 영상이 있을리 없는 단편 영화는 그럴 여지도 없다. 예전 폴리스 스토리나 러시아워같은 성룡영화에서는 크레딧에 NG 장면을 모아 보여주기도 했지만, 그 소소한 웃음을 위해 자신의 20분을 할애하는 관객은 많지 않다.
조금 씁쓸한 일인지도 모른다. 보기에 따라서는 당연한 일일수도 있고. 작품의 전면에 내세워지는 사람들은 그만한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에, 응당한 댓가를 받는 그들의 입지를 좁히면서까지 제작자들의 공로를 내세울 수는 없는 거다. 그렇다고 뒤에서 고생하는 모든 이들의 수고를 알아달라, 관객에게 강요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함께 고생했다고, 일한 사람 모두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뜻깊은 성의를 보여준다면 조금이나마 보람이 되지 않을까. 급여나 배당금처럼 일에 대한 댓가는 당연히 지불하는 것이니 차치하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방은 내게 무척 마음에 들었다. 하나의 작품에 이렇게나 많은 손길들이 거쳐갔구나, 그걸 한 명 한 명 다 챙겨주면서도 사람들의 시선도 가져갈 수 있도록, 전시를 해놓다니! 괜시리 뿌듯한 마음에 나는 튀어나온 상자들을 한 번씩 쓸어보았다.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거대한 작품에 요만큼 작은 이름하나 얹을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더 먼 미래에는, 제작자의 입장에서 함께 일한 사람들의 이름을 어떻게 넣어줄지 고민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어진 기념품 가게. 두시간 반 동안 관람했던 스튜디오의 크기만큼이나 기념품 가게의 크기도 굉장했으며, 컨텐츠 역시 굉장했다. 쇼핑에 할애한 시간 역시 두시간을 넘었으니. 실제 나무를 깎아 만든 마술 지팡이부터, 책과 영화에 언급되었던 군것질거리도 팔고 있었다. 해리포터 각 시리즈를 대표하는 문양을 딴 열쇠고리나 뱃지, 팔찌, 시계 등의 악세사리는 물론이고 기숙사 배정 모자, 심지어 신비한 동물들의 모양을 딴 인형도 있었다! 내일이면 런던을 떠나는 일정이었기에 나는 하루 동안 군것질 할 정도의 현금만 남겨놓고 전부 써버리리라 마음먹었다.
관람객의 입장에서, 또 해리포터라는 작품의 팬인 입장에서 해리포터 스튜디오는 참 굉장한 곳이었다. 소소한 소품들의 제작과정은 물론이고, 작품을 읽고 또 보고 들으며 가지게 되었던 환상을 거의 모두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 기차도 타보고, 지팡이도 휘둘러보고, 심지어 등장인물들의 지팡이를 살 수도 있었다! 해리가 먹고 인상을 찌푸렸던 젤리를 먹어볼 수 있었고, 헤르미온느가 찼던 시간을 돌리는 모래시계를 살 수 있었으며, 시리우스와 루핀이 이용했던 호그와트 지도를 만져볼 수 있었으니.
나아가, 작가의 입장에서도 이 곳은 꿈만 같은 곳이 아닐까! 자신의 머릿속에서 한참 만들어냈던 환상들을 잘 조합하고 추려내 만든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는 것만해도 황홀한 일인데, 이제 그 추려지기 전의 조그마한 환상과 설정들을 눈에 보이도록 전시를 해놓는 것이니. 만약, 나의 작품이 전 세계로 팔려나가고 그 박물관이 세워지며, 매일 손님이 예약을 해야 올 수 있을 정도로 붐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그 때쯤이면, 더 이상 작품으로 인한 수입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게 될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고, 빠져들어서 답답하고 화도 났다가 울먹거리고, 웃게 될 것인지에 더 신경이 쓰일까? 이렇게 새로이 생겨난 궁금증은, 다시금 내 버킷리스트에 추가됐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