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28화

아파트

by 봄단풍

본격적인 무더위를 데리고 오기 전 마음을 달래려는 건지 장마는 예년보다 일찍 찾아왔다. 평소처럼 분리수거를 하던 수요일 저녁, 아직 해가 지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어둑어둑해지던 하늘은 그 날부터 빗줄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거리마다 펼쳐진 우산에서는 둔탁한 소리가 나고, 아스팔트 위로 어지럽게 동그라미가 퍼져나가고. 맞으면 정수리가 욱신거릴 정도의 무게감있는 비는 끝이 없을 것처럼 계속됐다.


멍하니 아파트 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종종 준상이형이나 호준이네 집에 술을 사들고 가기도 했지만, 꼭 자기 전 한 두 시간은 음악을 틀어놓고 밖을 내다보곤 했다. 아침마다 내가 걸어나가야 할 도시를 바라보는 것도 즐거웠다. 연둣빛 물든 도심의 공원이 짙은 녹색으로 젖어드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 분무기처럼 빈틈없이 뿌려지는 빗줄기를 보는 것도 좋았다.


장마가 찾아오면서 몸은 바빠졌지만 마음에는 여유가 생겼다. 일이 바쁘고 사람들과의 약속을 잡기도 정신없었지만, 행복을 느끼는 하루하루는 계속됐다. 아직 입주 후에 한 번도 못 본 세대들도 있었기에 빼곡하게 약속을 잡았고, 그 약속들은 야근이 생기거나 주리와의 약속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미뤄지고 또 바뀌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서 사과할 일이 많아졌지만 가까워진 사람도 많았고, 그 때문에 피로는 늘었지만 아침에 눈 뜨기가 즐거웠다.


그 날은 참 기분이 좋은 날이었다. 가장 일이 많을 월요일인데, 그래서 아무런 약속도 잡지 않았는데 일찍 퇴근을 했기 때문이었다. 더위에 견디고자 얼마 전에 산 얇은 정장 바지가 빗속에서 찰박거리느라 정강이까지 전부 젖어버렸음에도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신나게 걸어와서 다른 약속을 잡지 않고, 지금 이렇게 따뜻한 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오늘 뭐하세요?』


기적처럼, 주리에게서 온 그 연락은 오늘 바로 저녁을 같이 먹자는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 뿐이라면 평소에도 종종 주고받던 연락이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빠 혹시 술 드세요?』


우는 이모티콘, 절망하는 모습의 캐릭터를 몇 번 보내던 주리는 갑작스레 그런 질문을 던졌다. 저의를 파악할 새도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볼 만도 했지만, 어느새 나는 본능처럼 손가락을 두드려 답장을 완성해 보낸 것이다. 그럼. 물론이지!


주리는 지금으로부터 한 시간 뒤 이 근처로 오기로 했다. 면접으로 보고 집에가는 길목이라며. 나는 그 때까지 비에 젖은 정장을 말리고 다시금 나를 정돈하면 된다. 이제야 해가 저물어 가는 이른 저녁에, 다른 사람도 아닌 주리와 저녁을, 그것도 그냥 식사가 아니라 술을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자연스러움을 위해 입던 정장을 말려서 다시 입고 나가는 것이 멋있어 보일까? 편하게 어려움을 털어놓으려면 청바지와 반팔차림의 편한 복장을 입고 나가는 것이 좋을까? 깔끔하고 정갈하게 비즈니스 캐주얼로 갈아입고 나가면, 자기 관리도 철저하고 패션에도 관심이 많아 보이는 세련된 남자로 보일 수 있을까? 술을 마신다면 힘든 일이 있는 것일까, 그러려면 나는 그녀에게 의지가 되는 든든한 사람으로 보여야 할 것인가, 편한 친구처럼 다가가야 할 것인가.


설레는 마음을 공기밥 눌러 담듯 꾹꾹 눌러가며, 나는 차분히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셨다. 지금의 빗소리는 세레나데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 웅장한 행진곡을 연주하기 전 박자를 만드는 작은 북의 소리. 조수미 선생님이 목소리로 사람들의 귀에 행차하기 전 융단을 깔아놓는 하프의 아르페지오.


그래, 첫 만남에 욕심내지 않으리라. 편하게 주리의 속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자. 주현아, 너의 충고를 내 잊지 않으리라. 그리고 만약에 먼 훗날, 아니 멀지 않은 훗날 좋은 결과를 보게 된다면 내 이 은혜 잊지 않고 꼭 갚으리라.


들썩대는 가슴을 어떻게든 억누르려 따뜻한 차를 마신 것이었는데, 어느새 나는 1분도 되지 않아서 찻잔의 바닥을 보고 있었다. 혀와 입천장에 모래를 깐 듯 까끌까끌한 식감이 입 안에 가득했지만 나는 마지막 남은 차 한 모금으로 양치를 하듯 우물거리다가 삼켜버렸다. 진정해. 이럴 때 꼭 사람은 실수를 하게 되어있으니, 진정하자. 빗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달래자.


아파트의 정문이 내려다보이는 베란다에서, 나는 숨을 들이마시며 바깥을 잠시 바라봤다. 넓은 새시 덕분에 도시에 비 내리는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이 전망 하나만으로도 아파트에 들어오길 잘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때였다. 아파트 정문에서 수상한 낌새를 발견한 것은.


처음에는 지나가는 사람으로 보였다. 거무튀튀한 인영이 지하철 쪽에서 오더니, 아파트 정문에서 서성대기 시작한 것이다. 아파트 주민인가 싶었지만, 주민이라면 카드키를 찍고 들어오거나 철문에 설치된 인터폰으로 안에 있는 사람에게 연락해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철문 너머 안쪽을 보고, 바깥쪽을 보고, 다시 안쪽을 보며 사람들이 있나 없나를 살폈다.


그러더니, 갑자기 철문을 넘을 것처럼 제자리에서 펄쩍 뛰기 시작했다!


하필 해질녘에, 비까지 오는데 그런 모습을 보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주리와의 약속으로 기분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경찰을 불렀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여유로 생긴 단 몇 초의 시간 덕분에, 나는 아파트에 소란을 일으키는 대신 다른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몇 초 만에 그림자는 지쳐서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사람임에는 분명했다. 길 가다가 참 많이도 마주치는 노숙자 중 한 명일 수도 있었고, 혹은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정신적인 장애가 있는 분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벌써부터 술에 취해 진상을 부리는 사람일 수도 있었고, 구걸하다가 비에 지쳐 쉴 곳을 찾다가 쓰러진 거지일 수도 있었다. 다만 어느 쪽이든, 내가 굳이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곧 경비업체 직원들이 알아서 잘 처리해주시거나, 본인이 정신을 차리고 다른 곳으로 가겠지.

나는 나지막이 혼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은 그림자는 그 때까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설마 몸을 가누지 못할 상황에 다다른 것인가, 잠시 두려웠지만 다행히 그 그림자는 마치 자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뒤척이기 시작했다. 가끔씩 그 옆을 지나치는 사람들이 별다른 행동없이 비켜서 가는 걸 보면 심각한 상황은 아닌 듯 했다.


곧 해결되겠지. 나는 그렇게 오 분 정도를 더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주리와의 약속에 늦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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