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review moments

누구에게서 문학적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뻘글

by 사색의 시간

퇴근 무렵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퇴근하자마자 헬스장으로 달려가 웨이트를 빡세게 했다. 기분이 안좋은데도 웨이트를 하다니. 확실히 나는 전보다 성장했다. 게다가 이렇게 작업실까지 왔으니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하지만 딴짓을 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사실 어제 집에 벌레가 나왔다. 무서워서 못 들어가고 있는거다)


하루키가 영미권 작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라디오를 듣다가 문득 나는 그런 것이 있나 싶었다. 나중에 소설가가 되서 '어떤 작가의 영향을 받았죠?'라고 누가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지?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아직 작가가 되려면 멀었다는 걸까? 라디오에서 그랬다. 작가가 되려면 그 전에 독자로서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고. (그 뒤에 '모든 작가가 다 그런 건 아니'라고 하긴 했지만)


감명 깊었던 작품들을 떠오르는 대로 써보았다. 그러니 이건 <2020년까지의 나의 독서 기억> 정도로 해두겠다. 추후 업데이트가 되길 바라며.


어릴 적 읽은 동화, 위인전 중 기억나는 건 <빨간 구두>다. 춤춘다고 발을 잘라버리는 것도 이해가 안되는데 주인공이 잘린 발에 붕대를 감고 목발을 짚고 교회에 가서 회개 기도를 하는 것도 이해가 안되서 기억에 남았다. 유년기에 읽었던 것 중 가장 충격적인 책은 <나는 전쟁이 싫어요>라는 그림책이다. 유고슬라비아와 사라예보 (어린애한테 어려운 지명이었을텐데 전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에서 벌어진 전쟁을 겪은 아이들이 당시 상황을 그린 그림들이 가득한 책이다. 크레파스로 엉성하게 그린 그림이었는데도 너무 처참하고 슬펐다. 아니 그래서 더 생생하게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본 뒤로 나는 평생 전쟁을 두려워하며 살게 되는데....(게다가 사는 곳이 남한)


중1 때 서점 가서 책 구경 하다가 <기형도 전집>이라는 책이 포장되어 있는 걸 봤다. 그래서 나는 그게 그림책인 줄 알고 샀다. '기형도 = 이상하게 생긴 그림' 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시집이었다......그렇게 기형도를 읽고, 백석도 읽고, 김수영도 읽고...그때 좋은 거 많이 읽었구만. 이 세 사람 꺼는 전집 다 샀었다. 지금은 없지만. 중3때 쥐스킨트의 <향수>를 책상 위에 올려놨는데 영어 선생님이 그런 거 읽지 마라고 했었던 기억도 있다.


고딩 때 수업시간에 수업 안듣고 책을 읽어서 그때 기억이 많다. 고3때 '하...뭘해야 이 1년이 빨리 갈 수 있을까'하다가 조정래를 읽기로 택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읽으니 졸업 시즌이 다가와 있었다. 고1부터 이짓을 했더라면 박경리의 토지도 읽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영원의 아이>를 읽고 이틀 정도 멍했던 기억이 있으며 친구들이 하루키를 읽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보다 무라카미 류!"를 외치며 류를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면 영향 받은 사람을 굳이 꼽자면 무라카미 류가 아닐까.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를 정말 재밌게 읽었다. 왠만해선 같은 책을 두 번 읽지 않는데 그 책은 지금도 가끔 본다. 아, 쓰다보니 기억났는데 나 이 책 필사도 했었다. 와우. 그 책을 보고 '음식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고 이왕이면 조금 섹슈얼한 분위기의 글을 써보고 싶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류의 작품 중에는 <69>가 영화화도 되고 유명한 건데 정작 그건 안 읽어봄.


20대 초반에는 철학을 읽었다. 공자, 맹자, 노자, 헤겔, 들뢰즈. (다 읽은 건 아니고 내가 읽고 싶은데만 읽음) 공자는 샌님인 줄 알았는데 읽을 수록 상남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노자는 천재이자 로맨티스트였으며 맹자는 말을 너무 잘해서 읽을 때마다 눈물을 철철 흘렸다. 얄짤없는 성격에 제자도 안남기고 가버린 맹자가 안타까우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조르쥬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을 읽고 '와 이거 내 인생책이다'라고 생각했다. (시간 순서상 여기는 아니지만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도 명작이다)


김형경의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은, 지금 기억 상 제일 재밌게 읽은 한국소설이다. 체루야 살레브의 <모독>은 내용은 기억 안나고 대학교 도서관에서 그걸 읽곤 쓸쓸해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한동안 책도 영화도 드라마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몇 년을 보낸다. 20대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를 보낸 뒤 조금씩 다시 책을 읽었다. 빈 속에 조금씩 미음을 떠넣듯이. 그래서 그 무렵 읽은 책들은 생명같다. 글쓰기 책을 읽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한형조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을 읽고 너무너무 좋아서 이 분 수업을 듣기 위해 다시 대학에 갈까 심각하게 고려한 적도 있었다. 그때 암울했기에 망정이지 지금처럼 좀 살만했으면 진짜 학교 갔을지도......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너무 심심해서 김승옥의 <무진기행>부터 그 무렵의 한국 단편소설을 하루 한 장씩 필사했었다. 그렇게 한 장씩 베껴쓰고 나면 그래도 그날은 뭔가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황지우를 좋아하지 않지만 <뼈아픈 후회>의 도입부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는 압권이라고 생각했다. 황인숙의 <강>을 너무 좋아해서 틈만 나면 읽었다. 김행숙의 시도 많이 읽었다. 백수 때는 자기계발서를 엄청 읽었고 최근 들어서는 그냥 한 권 두 권 도서관에서 끌리는 대로 읽고 있다.





황인숙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나한테 침도 피도 튀기지 말라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음, 써놓고 보니 문학적 소양이랄까 줄기 같은 건 느껴지지 않고 중구난방이다. (인물 이름이 헷갈려서 영미권 문학은 잘 안읽음) 그치만 이 글을 쓰는 동안 기억 속에서 좋았던 작품들을 꺼내느라 신이 났다. 무언가를 견디느라 발버둥 칠 때마다 그 곁에는 책이 있었구나 싶기도 했다. 거쳐간 책들이 알게 모르게 나의 정서의 토대가 되어주기도 했겠지. 앞으로 나는 어떤 책을 읽고 누구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게 될까?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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