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review moments

버릴 수 있는 관계의 진득함

영화 <담쟁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by 사색의 시간

가족과 연을 끊으려 한 적, 한 번쯤 있지 않나요. 저는 동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주민 등록 상에서 온전히 혼자일 수 있는지 물은 적 있어요.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버리지 못하는 관계. 지워지지 않는 관계. 가족이라는 지독한 관계 속에서 조금 슬펐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 <담쟁이>는 버릴 수 있는 관계로서의 가족을 들여다봅니다. 국어 선생님인 은수와 옷가게 스텝인 예원은 함께 살지만 가족이 아니고 앞으로도 가족이 될 가능성이 낮습니다. 서로를 가족으로 여긴다고 하더라도요.


은수는 엄마 제사를 위해 본가를 찾습니다. 그곳엔 은수의 언니와 그녀의 딸 수민이 있습니다. 제사상 앞에서 여자 셋이 절을 올리는 장면이 제게는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집안의 크고 작은 제사를 치르면서 항상 '음식은 여자가 하고 절은 남자가 하는' 광경을 목격해왔기 때문이죠. 그들의 제사에 남자는 없었습니다.


제사가 끝난 후 귀가 길에 은수와 은수의 언니는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은수는 재활에 몇 년이 걸릴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하고, 은수의 언니는 안타깝게도 죽고 맙니다. 교통사고는 인물 각자의 관계와 욕망을 뒤흔듭니다. 수민은 고아원에 가고 싶지 않고, 은수는 예원에게 짐이 되기 싫고, 예원은 은수의 옆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만하자, 은수의 말에 예원이 소리칩니다.


"어떻게 언니를 버릴 수 있어? 만약에 내가 이렇게 됐으면, 언니는 나 버릴 거야?"

"난 버릴 거야."


주민등록상의 가족은 버려도 버려지지 않지만 은수와 예원은 정말로 서로를 버릴 수 있는 사이어서, 버릴 거라는 말이 섬뜩하고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대사는 기억에 의지해 쓴 거라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서로에 대한 둘의 태도는 극명하게 갈립니다. 예원은 괜찮고 은수는 괜찮지 않아요. 괜찮음과 안 괜찮음이 마주한 장면은 둘 사이의 괴리와 긴장을 나타내며 동시에 그 밑에 깔린 진득한 애정을 드러냅니다.


끝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은수입니다. 수민을 보육원으로 보내고 예원에게 통장을 건넵니다. 그리고 재활을 하러 병원에 들어갑니다. 수민을 보육원으로 보내는 장면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요. 검은 수트를 입은 (아마도 사회복지사인) 자들이 수민을 데려갑니다. 수민이 반항하는데도 그들이 수민을 데려가게 둡니다. 왜 은수는 수민에게 상황을 설명하지 않았을까. 계속 걸렸어요. 당장 설명할 수 없었을 거라 짐작은 하지만, 수민의 마음이 얼마나 다쳤을까 생각하면 제 마음도 아팠습니다.


재활기구 위에서 한 걸음 내딛는 은수를 보면서 저는 그녀의 선택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어요. 어서 낫기를, 어서 나아 예원을 만나고, 수민을 만나기를. 빌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원도, 수민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셋이 함께 할 날을.


가족의 의미와 역할을 되새기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유년 시절 저는 같이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왜 이 사람들이랑 같이 살지?' 하는 생각을 자주 했어요. 낯설었거든요. 앞으로 누군가와 함께 살게 된다면 낯설지 않은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리고, 모든 시간 함께 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삶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렵겠죠.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담쟁이>는 그것의 가능성을 희미하게 밝혀주는 영화였어요.


★★★★★ 담쟁이 이파리에 가닿는 진득한 시선.


사족)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노래가 무척 좋았어요. 크레딧을 유심히 봤습니다. 음악 김사월. 작사 김사월 한제이. 감독님이 작사에도 참여하셨나 봐요. 능력쟁이 감독님이세요. 앞으로의 작품도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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