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review moments

거장의 노트를 훔치다

by 사색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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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자마자 '거장의 노트를 훔쳐볼까! 우헤헤!' 하면서 뽑아들었습니다. 영화 이야기긴 하지만, 거장은 장르를 가리지 않죠. 이 책을 읽고 제가 가장 놀랐던 것은 거장들이 한결 같은 목소리로 '자신을 위한 영화를 만들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돌아보면 2020년 동안 저는 '소비자를 위한' 컨텐츠를 만들려고 애써왔거든요. (네 그래서 진도가 1도 안나갔습니다)


시드니 폴락
관객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자신을 위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자만심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영화란 재미있어야 한다. 명백한 진실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관객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표본으로 삼아야 한다.

우디 앨런
감독이라면 자신을 위해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어떠한 난관에 부딪치더라도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확실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모든 감독의 임무다. 내 생각으로는, 자신을 즐겁게 하는 영화를 만들고, 그것을 잘 만들면 관객, 적어도 특정한 관객 또한 즐겁게 만들 수 있다. 그렇지만 관객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려고 애쓰거나 관객이 좋아하게끔 만들려고 애쓰는 것은 잘못이다. 그럴 바에는 관객을 촬영장으로 불러서 감독을 시키는 게 낫다.

마틴 스코시즈
영화의 관점이 명확하고 개인적일수록 그 영화의 예술성은 높아진다. 영화의 주관이 뚜렷할수록 더 오래 살아남는 것을 나는 관객으로서 목격해왔다.

에밀 쿠스투리차
젊은 감독들이 저지르기 쉬운 최악의 실수는 영화가 객관적인 예술이라고 믿는 것이다. 영화감독이 되는 유일하게 올바른 길은, 자기만의 관점을 갖고 영화의 모든 수준에 그 관점을 씌우는 것이다.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자신을 위해 만들어야 한다. 물론 그 영화에 대해 자신이 좋아한 것을 다른 사람도 좋아하기를 희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들려고 하면, 관객을 놀래킬 수 없다. 관객을 놀래키지 못하면,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거나 결론을 끌어내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영화는 무엇보다 먼저 감독 자신의 것이다.

라스 폰 트리에
관객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만들면 안 된다. 그것은 함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업 영화를 만들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관객이 좋아하기에 앞서 감독 자신이 그 영화를 좋아해야 한다.

우위썬
나는 내 자신을 위해 영화를 만든다.

이렇게 많은 감독들이 '자신을 위해 작업하라'는 메세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나를 위한 작업이라. 명확하지는 않아도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 모호한 것을 가지고서 주섬주섬 작업을 시작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봅니다.


데이비드 린치
마지막 결정권을 포기하면, 그 후유증은 아주 크다. 나는 경험으로 몸소 깨달았다. <듄>을 찍었을 때 최종 편집권이 내게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너무 큰 상처를 받아서 3년이나 흐른 뒤에야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나는 아직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했다. 절대 아물지 않을 상처다.


사실 제가 독립출판이 아닌 기존 출판사를 통한 출판을 열망했던 가장 큰 이유는 '편집' 때문이었습니다. 내 목소리가 세상에 잘 퍼져나가게끔 편집자의 눈으로 한 번 정제되는 과정, 그 과정을 너무나 필요로 했거든요. 내 목소리를 여과없이 세상에 내보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작업하면서 별다른 편집 없이 제 글이 그대로 실린 적도 있었고, 편집자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수정작업을 거하게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수정작업을 하면서 '그래 이거야!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거야!'하며 기뻐했지요. 그런데 그 작업 이후로 새 작품 진도가 안나갑니다. 데이비드 린치의 인터뷰를 읽으며 '사실 내가 그때 상처를 받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꼭 상처가 아니더라도 글 안에서 내가 가지고 가야할 핵심을 지키지 못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어요. 최고의 편집자님을 만나 작업할 수 있어 행복했지만, 그와 별개로 수정 과정 안에서도 작가로서 지켜야할 것이 있지 않았을까.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드네요.


거장의 노트를 훔쳐보는 건 늘 설레고 재밌는 일입니다. 제 노트는 안 쓰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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