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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봄 May 21. 2016

날개 없는 천사, 오동찬 국립소록도 병원 의료부장

20년 동안 소록도 주민들의 손자로 아들로 살아온 주치의  


"어디 가세요?" "거시기 보러 가고 있어." "뭐 시기는 안 보시고?" "하하." 

전라남도 고흥 녹동항에서 1.6㎞ 길이의 다리를 건너면 만날 수 있는 섬 소록도. 이곳 소록도 안 국립소록도병원에는 20년째 한센인과 함께하고 있는 오동찬 의료부장(46)이 있다. 

그는 점심식사를 한 후 뒤축이 다 닳은 신발을 신고 소록도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어르신들의 안부를 확인한다. 두세 걸음만 걷다 보면 어김없이 "어디 가"라는 질문이 날아 들어오고 한참의 안부가 오간다. 5분 거리인 목적지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두 시간 남짓이다. 

"뽕업(봉업) 씨네만 자주 가고, 나한테는 자주 안 오고, 미워!"라며 애교 있게 눈을 흘기는 할머니에게 오 부장은 "어? 처제, 파마했지?"라며 곰살맞게 맞받아친다. 

오 부장은 "옛날에 이분의 형부가 구강암 수술을 받으셔서 매일 갔다"며 "환자의 처제라서 환자가 계속 처제, 처제, 하다 보니 나도 자연스레 그때부터 처제라고 부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주민 평균 연령은 74세, 소록도는 570명의 한센인들과 200여 명의 소록도병원 직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그림 같은 섬이다. 20대에 소록도에 들어온 오 부장은 한센인들의 '손자'였다가 이제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하다 보니 '아들'이 됐다며 웃었다. 

1994년 조선대 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이듬해 한센인을 위한 치과의사가 되겠다고 자청했다. 공중보건의로 소록도에 들어간 그는 이후 20년간 이곳에서 한센인들의 손이 됐다. 세포 끝이 죽어가 온전한 손가락이 없는 한센인들은 양치를 제대로 못해 자주 입 안에 고름이 찼다. 그는 하루 두 시간씩 자며 그들의 고름을 제거했다. 한센인들을 위한 아랫입술 재건 수술법을 개발하기도 했다. 본업은 치과의사지만 소록도 안에 다른 의사가 없던 시절에는 산부인과를 제외한 모든 진료를 다 봤다. 

2014년 그는 음지에서 헌신적인 의료봉사활동을 한 참 의료인에게 수여하는 '성천상'(중외 학술 복지재단 제정) 제2회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 것이 없어 상을 받지 못하겠다"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중외 학술 복지재단 측은 삼고초려를 해야만 했다. 소록도를 찾아간 기자에게도 그는 같은 말을 했다. "저는 정말 행복하게 놀면서 살아요. 진료도 재미있고,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수다 떨면서 아무 편견과 선입관 없이 살아왔습니다. 가족들이랑 재미있게 지내고 있는데 상을 받는다는 게 좀 그렇잖아요?" 

평균 연령이 높다 보니 소록도에서는 한 해에 70여 명이 세상을 떠난다. 남들보다 더 자주 이별을 겪어야 하는 오 부장은 매일같이 후회하면서 산다고 했다. "돌아가시고 나면 조금 더 잘해드릴 걸, 이런 생각이 너무 많이 들어요. 그래서 가능하면 한 번이라도 더 봐야지 하고 마을을 찾게 되는 것 같아요." 

함께 마을을 걷고 있는 기자에게 오 부장은 "여기도 그냥 조용한 어촌마을이죠?"라고 말을 걸어왔다. "이 병원이 올해 98주년이 됐어요. 그동안 소록도에 많은 간호사, 의사, 봉사자들이 왔다 갔는데 단 한 명도 한센병에 걸리지 않았어요. 한센병이 쉽게 옮는다는 편견이 제발 사라졌으면 좋겠어요. 병이 완치돼도 후유증과 흉터가 남듯이, 한센병을 앓고 난 분들도 외적으로 남들과 조금 달라지셨을 뿐 그냥 주변에서 흔히 뵐 수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다를 바 없어요." 

독신으로 홀로 동남아로 떠나 구순구개열(언청이) 환자를 수술하며 사는 게 꿈이었던 그는 소록도에서 '소록도 인기 짱'이던 간호사를 만나 결혼해 슬하에 두 딸을 뒀다. 가족을 이룬 그는 매년 명절이 되면 매달 월급을 떼어 모은 돈으로 온 가족과 함께 필리핀 등지로 해외 진료를 떠난다. 소록도에서 본인의 역할이 마무리되면 해외로 나가 진료를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크게 봉사하는 분들도 있지만 나는 그래요, 이분들이 아플 때 같이 아파해 주고, 기뻐할 때는 크게 기뻐해 주고, 같이 사는 게, 이게 선교가 아닐까 해요." 

1억 원의 상금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묻자 "비밀인데"라고 답하는 오 부장에게 "신발이라도 바꾸시라"고 말했다. 

그는 "환자분이 사 준 신발인데 너무 편해서 바꾸고 싶지 않다. 굽이 닳아서 비가 오면 미끌 거리는 것, 그거 딱 하나밖에 흠이 없다"고 말하며 웃는다. 그러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그 돈은 제 돈이 아니라 함부로 쓸 수 없다"고 답했다. "'아내한테 1억 원 받으면 정장 두 벌 사 줄게' 했더니 아내가 '그 돈은 당신 돈이 아니니까, 정장은 당신 월급으로 사줘'라며 도리어 혼이 났어요." 결국 1억 원은 고스란히 선교지의 아이들을 위해 쓰였다. 참, 그 남편에 그 아내다. '사람 바보'들이다.


after interview..

 2014년 8월, 저 멀리 땅끝 소록도 가는 길 앞에서 나는 네 잎 클로버를 발견했다. 내 행운은 그로부터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찾아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멀고 먼 소록도에서 다 떨어져 가는 신발을 신고 멋쩍게 웃던 오동찬 선생님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한센 환자들을 부모님보다 더 아끼는 그 마음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확인할 수 있었던 하루가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 중 하나다. '남 좋을 궁리'만 하는 사람 덕분에 한 없이 나 자신이 부끄러운 하루이기도 했다. 블로그를 만들기 위해 2년 전 작성했던 기사를 다시 찾아 열어보다 이내 마음이 뭉클했다. 내가 글을 잘 써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눈빛과 선한 생각이 다시 떠올라 그렇다. 오늘도 '거시기', '뭐시기' 하며 씩 웃고 있을 오동찬 선생님을 멀리서나마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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