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도 미적분을 공부한(에헴!) 이공계 출신이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숫자에 약하다.
심지어 경제신문 기자이고 한때는 재테크 팀 소속인 적도 있었지만, 나는 돈 관리에 큰 관심이 없다. 내 통장에 얼마의 돈이 들어있는지, 내가 한 달에 얼마의 돈을 쓰고 있는지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내 월급이 정확히 얼마인지도 확인하지 않는 게 나라는 족속인지라, 결혼 후 돈관리는 남편이 전담하고 있다.꽤 많은 미니멀리스트들이 미니멀라이프를 도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절약`이지만 나의 도전기에서 이 키워드는 주된 목적이라 할 수 없었다. 절약이 싫어서가 아니라 셈에 약한데다, 돈관리를 무척 귀찮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내가 돈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으니,우연히 접한 `휴면 계좌`에 대한 정보 때문이다. 은행이나 보험 등에 방치되어 있는 휴면계좌가 상당하며, 방치된 휴면계좌에 있는 돈의 경우 보험금은 2년, 은행은 5년, 우체국은 10년이 지나면 저소득층 복지사업에 쓰인다고 한다.
이 글을 접한 순간 나도 모르게 외쳤다. `안돼!`
저소득층을 위한 기부에 내 돈이 쓰이는 것이 싫은 게 아니다. 적어도 기부란 내가 알고 있어야 뿌듯한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은행이 나도 모르게 내 돈으로 좋은 일을 하게 해야 하지? 절대 안된다!기부를 하더라도 내가 찾아서 한다.
돈 관리에 대해서는 굼벵이 못지 않는 속도를 자랑하는 나지만 이때만큼은 신속하게, 전국은행연합회 휴면계좌통합조회(www.sleepmoney.or.kr) 서비스를 통해 잠자고 있는 내 돈을 확인했다. 10만원 정도 되는 적은 액수였지만, 그야말로 횡재한 기분이었다.
고백하건데 나에게는 휴면 계좌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집안 곳곳에 잠자는 돈이 숨어 있었다. 가령 생일 때마다 엄마와 시어머니, 동생 등 가족이 선물 대신 챙겨준 용돈은 사용처가 정해질 때 까지 통장에 넣지도, 쓰지도 않고 봉투째 보관했다. 선물 대신 준 돈이니, 내가 갖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이 돈으로 사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친척들이 아직 어린 딸에게 준 용돈도 마찬가지다. 아기를 위해 주신 돈이니 내가 써서는 안 되고, 아기 물건을 살 때 꺼내서 써야겠다는 마음으로 용처가 정해질 때까지는 봉투에서 돈을 꺼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그 봉투들을 한곳에 모아두지도 않았고 그 봉투에 메모도 해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어떤 봉투에 들어 있는 돈이 무슨 돈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종종 고가이면서 필요하거나 원하는 물건이 생겼을 때 `아 맞아, 이거 예전에 엄마가 준 돈으로 샀다고 생각해야지`라며 시원하게 `지르곤` 했다. 하지만 실제 구입엔 카드를 사용하고는, `엄마가 준 돈을 찾아서 계좌에 넣어야지`라는 결심만 하고 정작 잊었다. 이후에도 그 돈은 그대로 모셔져 있었다는 소리다.
이런 경우가 잦아 마법 같은 일도 종종 펼쳐지곤 했다. 엄마가 나에게 준 생일 선물은 현금 20만원이었지만, 나는 이 돈을 생각하며 20만원 상당 물건을 서너 차례 이상 구입했다. `아 엄마가 준 돈이 있지, 그걸로 샀다고 생각해야지`라는 주문 아닌 주문을 외우면서 말이다. 이미 그 돈은 화장품을 사는데 썼지만, 사실 그 돈이 아니라 내 카드로 구입한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돈봉투는 집안 어디엔가 있었고 또 무언가를 사고 싶을 때는 다시 그 주문을 외우며 물건을 구입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20만원이 100만원이 되는 마법이 내 삶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상상 속 돈으로 끝나지 않은 쇼핑을 하면서, 나는 축의금, 조의금, 부모님 용돈 등 급히 현금이 필요할 때마다 거침없이 생일 선물로 받은 현금을 꺼내쓰는 남편을 비난하곤 했다. "선물로 뭔가를 사라고 주신 돈인데 그렇게 쓸 거냐. 돈을 준 사람한테 예의를 지켜야지"라며 말이다.
하지만 이래봬도 나는 미니멀라이프 도전 중 아닌가! 조금 더 정신이 또렷해지고 나에게 집중하니 드디어 내 문제가 보였다. 아무리 돈관리와 셈에 관심이 없다고 해도 이렇게 쓸데없이 돈이 집안을 굴러다니는 것은 멈춰야만 했다.
일단 휴면계좌는 탈탈 털어 한 곳으로 모았으니, 이제는 집안 곳곳에 방치되어 있는 봉투들을 한데 모으기로 한다. 그리고 내가 비난했던 남편의 `수법`을 그대로 이어받아, 현금이 필요할 때 마다 이 현금을 사용했다. 다들 알고 나는 모르는 사실이었을 수 있지만, 이렇게 사용해보니 그돈이 그돈이다. 그리고 합치다 보니 어떤 봉투에 담긴 돈이 누가 준 돈인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너무 단순한 깨달음을 이제야 얻었다. `아, 돈은 한데 모아두고 누가 언제 돈을 주셨는지 정도만이라도 메모를 해 두자.`
정리가 안되면 돈이 새어나간다는 말을 종종 들었는데, 반대로 정리(비우기)를 하니 뜻밖의 수확을 얻기도 했다. 결혼 전에도 당연히 정리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정에 있는 내 방에는 여전히 짐이 한가득이다. 미니멀라이프 도전을 하면서 친정에 갈 때마다 책을 비롯해 내 방에 있는 짐을 조금씩 처분하고 있는데 책을 정리하다보니, 10만원 상당 백화점 상품권 3장과(심지어 사용처도 각각 다르다) 수백 달러가 들어 있는 봉투가 발견됐다. 달러는 출장과 여행에서 필요해 환전했던 돈이었을 테고, 백화점 상품권들은 선물 등으로 받았던 것을 `나중에 써야지` 생각하고 깊숙이 두었다가 잊어버린 것이다. 결혼한 지 만 5년이 됐는데 이제야 발견한 것이다. 내가 숨겨놓고(심지어 숨긴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쯤 되니 나도 나를 정말 모르겠다) 내가 까맣게 잊었던 이들을 다시 만나게 되니 예상하지 못한 기쁨과 전율이 느껴졌다.
윤선현 정리컨설턴트는 사람들의 집을 방문해 정리 컨설팅을 할 때 가장 많이 버리는 것 중 하나가 칸칸이 나누어진 수납바구니라고 한다. 칸칸 수납바구니는 양말이나 속옷을 칸마다 하나씩 넣는 것인데, 정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부담이 없지만 정리를 귀찮아하는 사람에게는 칸에 하나씩 물건을 넣고 빼는것이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차라리 네모 반듯하게 접어 큰 바구니에 수납하는 것이 훨씬 간편하다고 한다. 어쩌면 돈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돈 정리를 못하면서 `이 돈은 이렇게` `저 돈은 저렇게` 써야지 생각만 하고, 이 카드 저 카드 혜택을 따져가며 신청하던 나는 어쩌면 돈 관리를 잘 하는 사람의 `흉내`를 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돈관리의 달인들은 매달 다른 통장에 돈을 넣으며 복리 효과를 누리는 `예금·적금 풍차돌리기`가 제격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물건처럼 돈도 한 곳에 모아야 새지를 않는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넣지 말라는 게 투자의 정석이라고는 하지만, 나누는 것은 계란 한 판을 먼저 채우고 나서 해도 늦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