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버리기 1년 후 이야기
예전에 남편과 함께 '신박한 정리'라는 TV 프로그램을 같이 봤다. 오정연 아나운서가 등장하는 편이었는데, 남편이 보는 내내 '너를 보는 것 같다'며 놀렸다. 정말로, 너무나도 이해가 안 되어 "내가 저 정도라고?"라고 반문했지만 남편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응,물론이지. 예전 네 방을 떠올려 봐"라고 대답했다.
TV 속 오정연 아나운서는 '추억 속에 사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나운서 시절 준비했던 자료를 버리지 못하고, 대학 교재와 대본까지 차곡 차곡 쌓아두고 있었다. 추억이 너무 많아 공간을 전혀 활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능 성적표와 아나운서 시험 응시표, 20여 년 전 대학 시절 동아리 유니폼까지 보관하고 있던 그녀와 내가 같다고?
골똘히 생각을 하다 보니 과거의 내가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교복을 버리지 않고 꽁꽁 숨겨두던 과거의 나를 내가 잊고 있었다니. 나도 참. (하하하) 조금은 쑥쓰러운 과거를 덕분에 들춰보게 됐다.
나 역시 추억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 중 하나였다. 일례로 수습기자 시절부터 사용했던 기자수첩들을 한 권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 100여 권에 달하는 수첩이 방 한쪽에 꽉꽉 쌓여 있었다. 지금은 스마트폰 녹음 기능이나 노트북을 십분 활용하지만, 그때만 해도 기자수첩을 들고 돌아다니며 열심히 메모를 했더랬다. 그렇게 발품 팔아 모아놓은 정보를 쉽게 버리고 싶지 않았다. 미처 컴퓨터나 휴대폰에 저장해놓지 않은 정보사항을 다시 들춰봐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언론사 준비 시절 썼던 논술·작문, 상식시험 준비 자료도 다 그대로 있었다. 대학 시절 리포트나 필기도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필기를 보면, 대학교 도서관에서 친구들과 열심히 공부하며(수다떨며) 보낸 시간들이 떠올랐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가 아쉽고 그리워서, 열심히 살았던 내 흔적들을 비워내지 못했던 것 같다. 전공서적을 쌓아놓은 것은 기본이다. 전공 책뿐 아니라 당시 시험 답안지까지 모두 있었다. MT 때 만든 과티와 축제 때 사용했던 응원도구도 고스란히 내 방에 모여 있었다.
이렇게 추억을 '기리는' 나라는 존재를 깜빡 잊었던 것은 이 모든 물건들이 친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을 했지만 여전히 친정에는 내 방이 있고, 그 방에는 내 추억들이 가득했다. 이들을 그대로 내 공간에 두고 새 공간에 둥지를 틀었던지라 그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머리가 좋아서 그래." 남편은 추억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해주었다. "추억의 물건을 보면, 그때 상황이 바로 떠오르니까 버리지 못하는 거잖아. 굳이 그때가 떠오르지 않으면 간직할 필요가 없지." 맞는 말이다. 나는 추억의 물건들을 버리면 내가 그때의 나를 잊을 것만 같아서, 미처 물건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매일매일 물건을 비워내는 '미니멀 게임'을 시작하면서 한껏 공간 확보가 주는 상쾌함에 취해 있었던 나는 1년 전 어느 날, 친정에 방문해 무지막지하게 복잡한 '내 방'을 보고 기겁을 하고 만다. 추억이 가득한 내 방은 감동스럽기보다는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이제 좀 버리면 안 되냐'고 잔소리하던 엄마도, 주인 없는 방에 쌓인 물건을 더 이상 치우지 않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 나는 모든 추억의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말이 정리지, 사실은 비우기였다. 전공서적도, 기자수첩도, 각종 리포트와 서류들도 다 분리수거함에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스무 살 적 친구들이 내 책과 수첩에 남겨둔 장난스러운 글과 쪽지도 발견했다. 순간 망설여졌지만 즐겁게 인사하면서 보내주었다. 그 쪽지는 내가 이들을 비우기로 결단하지 않았다면 영영 발견하지 못했을 존재 아닌가. 결혼 후 5년 넘게 들여다보지 않았고, '추억의 물건' 자체를 떠올리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이것들을 비우면서 깨달았다.
이제는 이들을 비운 지 1년이 넘었다. 추억의 물건들을 떠나보낸 그때의 나를 원망하거나 아쉬워한 적이 있던가? 단 한 번도 없다. 기자수첩을 버렸다고 해서 밤새 취재 현장에 서 있던 스물다섯의 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때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있는 것 아닌가. 열심히 논술·작문을 쓰고 고치던 나도, 학교 도서관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던 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내 추억들은 고이 떠나갔지만 그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만들어낸 '나'는 여기 있다. 현실에 집중해 하루하루 살다 보니 비워버린 추억을 떠올릴 짬이 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과거도 되돌아보지 못하는 현실이 아쉬웠나, 그렇지도 않다. 지금 이 순간 역시 놓치고 싶지 않은 하루하루였다.
정리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곤도 마리에 씨도 '추억의 물건'만큼은 가장 마지막에 정리하라고 할 만큼 추억이 깃든 물건들은 버리기가 어렵다. 나에게도 추억의 물건을 보관하는 상자가 하나 있다. 그곳에는 차마 비우지 못한 물건들을 넣어뒀다. 대신 남편과 이 상자를 더 이상 늘리지 않기로 약속했다. 상자가 넘치면 함께 그 상자를 꺼내 버려야 할 물건들을 버리고 새로운 추억들을 보관할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남편과 지난 추억을 나누고, 그 기억 역시 마음속에 보관한다.
추억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남편의 칭찬(?)이 다시 떠오른다. 물건을 보고 과거의 그 순간을 기억할 만큼 똑똑한(!) 나지만, 이 똑똑한 머리를 보다 현실에 집중해 가면서 살기로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