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문명을 거슬러 보자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비우는 것 보다 쉽다

by 새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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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 액정이 박살나버렸다. 길 한복판에서 투정을 부리는 아이를 안다가 그만 휴대폰이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다. 박살 난 액정만 고쳐서 쓰기에는 사용한 지가 2년이나 지나버렸다. 어쩔 수 없지만, 정말 아쉽지만, 새 휴대폰을 사야 하는 상황이 되고야 말았다(오예!).


스마트폰을 바꾸면 가장 먼저 하는 게 데이터 백업인 듯하다. 참으로 세상이 좋아져서 앱만 깔면 기존 휴대폰의 연락처와 문자메시지, 앱, 사진, 동영상까지 모두 새 휴대폰으로 옮겨올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기존 휴대폰의 배경화면도 그대로 새 휴대폰의 배경화면이 된다. 옮겨온 앱의 화면 배열까지도 같기 때문에 기계만 새것일 뿐 이전의 자료를 그대로 손에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아린이(IT 어린이)' '기계치'인 나는 IT업계에서 근무하고 있는 남편의 손을 당연한 듯 빌려 이러한 신세계를 맛보려 했다. "내 휴대폰 데이터 좀 옮겨줘" 남편은 '절대 귀찮아서 그런 게 아니라고' 강조한 뒤 모태 미니멀리스트다운 한마디를 던졌다. "그냥 이참에 새로 시작해. 새 휴대폰에 지저분하게 뭘 굳이 옮겨. 필요한 것만 그때그때 설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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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존 휴대폰에는 아이들의 수많은 사진과 동영상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쇼핑 앱을 비롯해 다채로운 앱들이 여러 페이지의 화면을 꽉 채울 만큼 깔려 있었다. 아이가 귀여워 사진 한 장을 찍으려 카메라를 켜면 카메라 화면이 아니라 '저장공간이 부족합니다'라는 알림 팝업이 먼저 나를 반겼다. 앱도, 사진도, 동영상도 참 지우고 싶은 게 없는데 뭘 지워서 저장공간을 확보하란 말이지? 답답한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짐승 용량의 휴대폰을 새로 사고 싶다는 열망이 커져만 갔다. 이미 기존 휴대폰에도 남편이 추가 대용량의 추가 메모리카드를 장착해 준 상태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말이다.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불의의 사고로 현재 사용하고 있는 휴대폰이 몇 달 전 '공장 초기화'가 되어버린 안타까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백업을 해 둘 새도 없이 연락처와 사진을 비롯해 모든 휴대폰 속 정보를 공기 중으로 날려버렸다. 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많은 것이 정리되었다며 기뻐하는, 뼛속까지 미니멀리스트인 인물이다.


직업 특성상 연락처와 메시지는 완전히 지워버릴 수 없기에, 두 가지만 남겨둔 채 모든 것을 지웠다. 기존 휴대폰에 담겨 있는 동영상과 사진은 시간 날 때 외장하드로 안전히 옮기기로 했다. 앱도 필요할 때마다 새로 깔면 되겠거니 했다.


물론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다. 가장 불편한 점은 휴대폰에 있던 공인인증서가 사라진 것이다. 은행 앱에서 본인인증을 받고 공인인증서를 다운받는 과정이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음, 그리고 또 흠…? 없나? 정말로? 없다! 필요한 앱을 그때그때 설치하는 데 대한 번거로움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이를 '불편하다'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었다.


최신 기술을 통해 기존 휴대폰의 데이터를 모두 옮기는 과정은 매우 편리하다. 하지만 남편의 말이 맞았다. 이 데이터를 모두 옮기고 나면 나는 정리의 늪에 또 빠지고 말았어야 할 것이다. 스마트폰은 매우 친절해서 주기적으로 3개월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앱을 나에게 알려주고, 원활한 구동을 위해 이 앱을 지우라는 권유도 하지만 나는 이 권유를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 그래도 필요할 것 같으니 일단 둬 보자라며 방치할 뿐이다. 디지털 공간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기에 더더욱 정리에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필요한 앱을 그때그때 설치해 가며 약 일주일이 흐르고 나니 앱을 설치할 일이 거의 없었다. 기존 휴대폰을 켠 채 깨진 액정 사이로 비치는 화면과 새 휴대폰 화면을 비교해보니 쇼핑 앱만 3분의 1 이상 줄었다. 여행을 가지 못하면서도 '언젠간 갈 거야' 라며 깔아둔 여행 앱부터 각종 육아 정보 앱까지 참 많은 앱을 설치해놓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바꾼지 두 달, 언젠가 한 번은 들여다보겠지 싶었던 그 앱들은 새 휴대폰에 여태 자리 잡지 못했다. 아니, 영영 자리 잡지 않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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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남자의 미니멀 라이프'의 저자인 죠슈아 필즈 밀번과 라이언 니커디머스가 소개했던 '짐싸기 파티'가 떠오른다.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하루 만에 모든 짐을 싼다. 옷장과 서랍장을 비롯해 온 집에 흩어져 있는 짐을 모두 상자에 담는다. 사용하지 않는 덩치 큰 가구나 전자제품은 큼지막한 종이 포장지로 포장한다. 칫솔같이 앞으로 사용할 가능성이 높은 물건이라도 빼놓지 않고 모두 상자에 담거나 포장해야 하는게 이 파티의 규칙이다. 그런 다음 일주일간 필요할 때마다 짐을 풀어 꺼내 사용한 후 그 물건이 있어야 할 자리에 둔다. 일주일 후, 여전히 상자 안에 들어있는 짐을 모두 버리거나 기부하거나 파는 것이 파티의 마무리다.


실제 집 안의 짐으로 '짐싸기 파티'를 하려면 엄청난 결단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휴대폰은 다르다. 짐을 쌀 필요도 없다. 그저 새로 시작하기만 하면 된다. 약간의 번거로움 끝에 오는 상쾌함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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