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스펙들이 좋으셔서요

[돌고 돌아 재입사]

by 봄책장봄먼지

씩씩하게 할 말을 하고 돌아왔다고 생각한 날,



나는 비로소 재입사를 실감했다. 원치 않는 퇴사였지만 그렇다고 퇴사까지 뒤집고 내가 다시 재입사를 하다니. (물론 매일 나가서 일하던 예전과 달리 수업이 있을 때만 나가는 프리랜서 강사라는 점이 다르지만..)


돌고 돌아 겨우 간 곳이 옛 직장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지금 하고 있는 일(책 만드는 일)로 밥벌이를 충분히 할 수 있었다면 구태여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으리라는 원망을 스스로에게 보태기도 하였다.

이러나저러나 재입사가 나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내게 돌진하고 있었다.



"내일 시간 되세요? 계약서를 써야 해서요."

그때 들려오는 소리. 계약서라는 것을 써야 한단다. 코로나라 회사에서 모이지는 못했다. 갑의 대리자인 담당자(새로운 과장님)가 강사라는 을을 친히 찾아왔다. 어디 카페로라도 들어가시죠. 갑은 강사, 곧 나에게 찾아와 카페 안에서 계약서를 내밀었다. 1년, 아니 정확히는 3월부터 12월까지의 계약이었다. 그 나름 '계약'이라는 중대한 절차를 앞두고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하기로 했고 나는 해야만 했다. 주사위가 1이 나오든 6이 나오든 내 탓이거나 내 책임이다, 이제부터 온전히...


예상대로 차를 마셨고 생각한 대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천천히 읽어 보세요. 두 장뿐인 계약서를 꼼꼼히 읽었다. 전과 달라진 내용은 거의 없었다. 존재하던 계약서 양식을 붙여 넣기 하고 연도와 금액 등을 조정했으리라. 나는 시간당 강의료와 강의료 지급 날짜에 눈도장을 찍은 후 주민번호를 적고 계좌번호를 적었다. 행여라도 계좌번호가 틀릴까, 은행 앱을 열어 열심히 숫자를 대조했다. 내겐 이 숫자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다른 강사님들 이력서를 추리고 있어요. 곧 면접 날짜가 정해질 거예요. 그때 선생님도 오셔서 동료평가위원 자격으로 면접에 참여해 주시면 돼요."

"아, 저도요?"

"네. 그럼요. 선생님이 잘 아시니까."



알긴 뭘 아나, 이 사람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현 상황으로서는 이 사업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나뿐이었다. 나와 갈등을 겪던 그녀가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으리라. 네가 이 사업을 잘 안다고? 하지만 별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없는 공간에서, 나라는 인간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물론 나는 기꺼이 붙잡혀 주었다.



내 앞에 앉은 과장님은 커피를, 나는 유자차를 홀짝홀짝 마시며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 조 과장님은 지금 그럼 뭐 하신대요?"

"자기 사업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얼굴이 더 좋아지셨어요. 더 젊어지셨어."



나에게 메일을 보내 강사 제안을 하셨던 조 과장님은 사실 내가 전 직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 몇 개월간 협력했던 과장님이셨기에 내게 익숙한 분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퇴사를 했다. 알고 보니, 나를 고마워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퇴사를 앞두고 이 사업을 잘 넘겨야 하는데 강사들도 구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나 같은 수준의 강사라도 감지덕지였던 것이다. 마음 편히 퇴사할 수 있도록 내가 그분의 퇴사 길을 틔워 준 셈이다.



"이력서 보내신 분들이, 다들 스펙들이 너무 좋으셔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요.”

새로 업무를 맡은 과장님이 스치듯 던지는 이 이야기에 유자차를 들이켜던 나의 들숨이 갑자기 턱 하니 목에 걸렸다.

'스펙들이라…….'


며칠 전 경력자인 나의 이력서가 필요하다고 전화가 왔었다. 자연스러운 절차였고 나는 간단한 이력과 학력을 적어 보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은 아마 그때 나의 이력서를 읽었을 테다. 읽었는데도 저 말을 하는 것일까. 다들 스펙들이 좋으셔서요. (너만 빼고, 라는 소리?)


아니, 아무 저의도 없는 순수한 의도라는 것은 안다. 스펙. 나 혼자만 약간 체하는 단어일 뿐이다. 황무지 같은 이 사업이 방향을 잘 잡으려면 좋은 사람들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좋은 사람의 조건에는 학력도 포함되어야겠지. 반면 나를 채용하려는 기준에는 학력보다는 경력이 섞여 있을 것이다. 열심히 살아온 내 과거이지만, 그 누구도 내 이력서를 들여다보며 오, 스펙이 참 좋군요, 라는 말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홍보도 선생님이, 경험이 좀 있으시니까 맡아 주시길 바라는 것 같아요, 연구관님이.”


담당자가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강의만 하면 된다는 메일의 내용이 다시 한번 떠올랐지만 계약서를 앞에 두고서 나는, 할 수 있다면 해야죠, 라고 말해 버린 후, 자문료는 물론 챙겨 드릴 거고요, 라는 대꾸를 뒤이어 듣는다. (그것은 참 다행이다.)



간간이 상투적인 웃음이 오가고 서로 잘 부탁한다는 갑과 을의 통상적인 인사를 나눈 후 ‘전 그럼 이만’이라는 말들을 건넨다. 뒤이어 두 사람은 다른 교통수단으로 갈라진다. 코로나라 언제 다시 시작할지 모르는 수업이지만 수업 때 다시 보자는 기약 없는 인사를 나누고 돌아선다. 을이 먼저 카페 문을 어깨로 밀치며 밖으로 나온다.



퇴사를 하며 하나의 직장에서 쌓아 올렸던 내 스펙은 이력서에 1년 8개월의 경력으로 남았다. 그동안 성장이라는 동력을 딱히 얻은 것 같진 않다. 어쩌면 나의 스펙은 퇴보했는지도 모른다. 그 동료와 마음 가득 할퀴고 뒤엉켜 싸우던 그 시간들이 한 줄의 이력으로만 간결히 정리되었다. 오늘 마신 유자차의 뒷맛이 어쩐지 좀 씁쓸하다.




그리고 며칠 뒤,

“면접 대상자들 이력서 보내 드려요.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파일 비밀번호는 ◯◯◯◯입니다.”


나와 같이 일할 예비 강사들의 스펙이 비밀번호를 달고 내 메일로 도착했다. 파일을 여니 과연 담당자가 말한 대로 스카이에 근접하는 학력들도 많았고, 적어도 나보다는 화려한 이력들이 구석구석 이력서를 채우고 있었다. 면접 대상자들은 말 그대로 ‘스펙이 좋으셔서’ 아무 문제가 없을 듯했다.



이곳에서의 문제는 아마 나 하나뿐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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