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틈이 월급루팡

[돌고 돌아 재입사]

by 봄책장봄먼지


“안녕하세요.”

연구관님이 회의의 포문을 연다. 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린다. 마이크 표시가 자동으로 해제된다. 여러 사람의 얼굴과 음성이 큰 화면으로 번갈아 나타난다.



“과장님 오시면 제가 한 분씩 소개해 드릴게요. 인사를 한 번씩 다 하셨긴 하지만 정식으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네.”

“네.”

“네.”


ZOOM 화상회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2020년 하반기 사업보고회다. ◯◯◯◯원 과장님이 마지막 차례로 카메라에 입성하신다. 연구관님의 소개와 함께 한 사람씩 카메라 앞으로 고개를 디민다. 이윽고 내 차례다.


"그리고 직접 체험관에서 강의를 해 주시는 강사 ◯◯◯ 선생님입니다. 선생님, 2018년도부터 일하셨나요?”

“아, 저는 2017년 4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일했습니다.”

“◯◯◯ 선생님은 1~2년간 이미 이곳에서 일하신 경험이 있는 강사님입니다. 2020년에도 저희를 다시 도와주셨고요.”


내 소개 앞에 부끄럽고도 거추장스러운 경력자의 딱지가 붙는다. ‘해 봤던’ 사람이라고 회의 도중 무슨 질문이라도 내게 건네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분명 어제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으시면 된대요. 저도 선생님도요."


운영을 담당하는 선생님께서 분명, ‘발표는 이사님이 하시고 저희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될 거래요.’라고 하셨는데, ‘해 봤던’ 사람이라 뭔가 촉이 온다. 불길한 조짐이 슬슬 나를 조인다. 과장님이 발표 자료를 보다 말고 질문 하나로 모두의 주의를 환기한다.


“아이들이 실제 오프라인 수업에서 선호하는 수업과 온라인 수업에서 선호하는 수업이 달랐나요, 어땠나요? 참여도에 차이가 있었나요? 그게 궁금한데.”

(이럴 줄 알았다. 실제 오프라인 수업을 해 본 사람이 여기서는 나밖에 없잖아;; 된장...)


"실제 수업도 하고 온라인 수업도 해 보신 봄, 먼, 지?? 선생님이 아실 것 같은데요?"

라는 과장님의 목소리. 저 소리는 설마 내 이름을 발음하시는 것일까 싶어 바짝 노트북에 한 귀를 가져다 대고 묻는다. "네?" 카메라 가득 내 큰 얼굴이 담긴다.


“아, 네. 실제 오프라인 수업 때는 직접 참여할 수 있는 ◯◯ 활동과 ◯◯ 활동이 인기가 많았고 참여도가 높았는데요, 온라인 수업에서는 아무래도 학생들 대신 교사가 ◯◯ 활동을 보여 주기 때문에 만족도가 오프라인 수업 때 비해 낮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


그 뒤로도 과장님의 질문이 이 사람, 자 사람에게로 계속 이어진다.

“여기 자문비를 지급했다고 되어 있는데, 자문은 누구한테 받은 건가요? 온라인 수업 관련해 외부 자문을 받았나요? 누구한테 준 거죠?”



용역업체 선생님: 봄먼지 선생님에게 지급했습니다.

과장님: 뭐라고요?

용역업체 선생님: 봄먼지 선생님이요.

과장님, 연구관님: 안 들려요. 더 크게 말씀해 주세요.

용역업체 선생님: 봄먼지 선생님이요.


내가 소속된 용역업체 선생님의 목소리가 다소 작게 들려서 과장님이 자꾸만 되묻는다. 애꿎은 내 이름의 공명만 화상회의장을 가득 메운다.



우리 사업, 급하게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하느라 외부 자문 없이 진행했다. 그리고 자문비는 다름 아닌 나에게 지급되었다. 나와 내 옛 동료 M이 없는 사이, 그리고 다른 회사가 용역을 맡는 사이에, 이곳 체험관 운영에 미비한 점이 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체험관에 대해 아는 이, 즉 프로그램 진행에 관해 아는 이가 초반엔 나뿐이라서 나의 의견이나 나의 강의 시연들에 자문비가 지급됐던 것이다.

업체에서는 자문비 지급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1년간 불모지, 황무지였던 곳에서 그래도 개간 작업을 열심히 도운 건 나였다고 감히 생각한다. (그 결과물이 설령 흉작이라 해도 말이다.)


학습 대상을 선정하고 학습 방법을 공유하는 데 나의 공이 적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자문비는 외부에 지급해야만 할 것 같은 돈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할 일 하고 돈을 받은 건데도 사업보고회에서 내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니, 자꾸만 내 이름 옆에 변명이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만 같다. 새로 오신 과장님께서 갑자기 내가 받은 아주 미세한 급여 찌꺼기들에 관해 궁금증인지 의아함인지 모를 질문을 던지시니, 괜히 내가 월급루팡, 곧 '월급도둑'이 된 것만 같다.

(그럼 도둑은 도망가야 하나? 물론 도망은 체질적으로 자신 있지만..)


슬며시 노트북 화면을 비스듬히 돌려놓고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도둑은 다행히 현행범으로 붙잡히지 않은 채 화상회의가 종료된다.



-선생님, 놀라셨죠? 그냥 저희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고 업체 선생님들이 그러셨는데, 갑자기 말 시키셔서 저도 깜짝 놀랐어요.

-네. 근데 왠지 그럴 것 같더라고요.


운영인력 선생님과 후일담을 나눴다. 예상은 했다. 경력자의 짬밥(?) 덕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최종 보고회에 참석하란 소리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난 아예 준비조차 안 했다. 그런데 보고회 전날 저녁에 전화가 왔다. 혹시 내일 최종 온라인 사업보고회에 같이 참여할 수 있겠느냐고, 그냥 ZOOM 앞에서 앉아만 있으면 된다고.


하지만 역시 이 세상에 '그냥 앉아만 있어도 되는 일' 따위는 없다. 돈을 받았으면 뭐라도 토해 내긴 해야 한다. 그래서 나 또한 몇 마디를 지껄이고 회의의 문을 닫았다. 어질러진 보고회 토사물을 어설프게 정리한 후 나는, 날숨을 내쉰다.


하아.. 끝났다.., 그래도..

오늘은 무사했다.


"전요, 월급루팡이 싫어요."

갑자기 환청이 들린다. 내 옛 동료, M선생의 목소리다. 일을 심히 잘해 내던 M. 그녀는 일을 대강하는 다른 선생을, '월급루팡'에 빗대곤 했었다. 오늘은 왠지 그 비유의 대상이 내가 된 것만 같다. M이 오늘의 나를 보았다면 또 한 번 나를, 도둑놈으로 취급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12월 17일. 올해의 모든 수업과 일정이 끝났다.

도둑은 이제 도둑질을 잠시 접는다.


내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내년에도 내가 이 도둑질을 '재계약'이라는 형식으로라도 이어 갈 수 있을까?



아니, 그들이 나를 도둑으로라도 다시 환영해 줄까?









이전 18화잠깐만, 나만 경로우대, 아니 경력우대 아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