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재입사]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1.
-저기, 과장님, 제가 주 강사 말고 보조 강사를 하면 안 될까요?
-네? 이 체험 내용을 전부 아는 사람이 지금 선생님밖에 없는데요?
-그래도, 저 부담 없이 그냥 보조 강사만 하고 싶은데.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경력자님.
2.
-저기, 저랑 같이 일할 사람 뽑는 건데 제가 꼭 면접위원으로 참석해야 하나요? 안 하면 안 될까요?
-네? 선생님, 여기서 또 이러시면 안 됩니다. 동료평가위원으로 참석하시는 건데 선생님이 해 주셔야죠. 질문도 날카롭게 해 주시고요.
- (.....)
3.
-저기, 그 강의 시연, 꼭 제가 해야 하나요? 안 해도 되면 안 하고 싶..
-선생님. 말씀드렸다시피,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다른 강사님들이 아직 수업 진행 방법을 잘 모르십니다. 선생님이 강의 시연을 꼭 좀 해 주셔야겠습니다. 돈은 다 챙겨 드립니다.
-(돈은 당연... 한 거고, 걍 하기가 싫다고요.)
4.
-온라인 수업으로 바꾸신다고요, 갑자기여? 저 그럼.. 관두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안 될까요? 아하하.
-선생님. 농담이죠?? 지금 방금 완전 심장 쿵, 했어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저, 농담 아닌데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어디 가서 아동 대상으로 하는 유튜브라도 보고 오세요. 장난감 가지고 놀아 주는 그런 유튜브 보면 좀 도움이 될 거예요.
5.
-저, 조금 전에 첫 온라인 수업도 망했겠다, 이참에 저를 갈아 치우시는 건 어떠실까요? 지금이 절호의 '해고 기회'입니닷!
-선생님,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여요.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잘리더라도 할 일은 다 하고 잘리셔야죠. 계약서에 잉크도 안 말랐어요.
6.
-선생님들, 회사가 바뀌었습니다.
-(앗싸, 저 그럼 이제 드디어 잘리는 거예요?)
-강사님들, 고용 승계가 다 된다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아... 아까워요. 스스로 안 그만두고 억울한 척 퇴사할 수 있는 공식적인 기회였는데요.
-어이쿠, 선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7.
-그럼 회사도 바뀌었으니까 계약은 언제쯤 다시??
-계약은 아직 모르겠고, 우선 학년별 시나리오부터 써 주세요.
-(계..계약도 안 하고 일 먼저..?)
-아 그리고,
-그리고 뭐요?
-새로 바뀐 회사 차장님과 과장님이 강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감이 안 잡히신다고, 한번 전체적인 강의를 해 달라시네요.
-(그... 그래서요? 그 강의 시연 전체를 저 보고 또다시 하라고요? 작년처럼?) 제... 제가 해야 하나요?
-네. 선생님이 혼자 대충 강의 시연을 해 주셔야 할 것 같네요.
-(강의도 제일 못하는 제가 왜요?) 저 혼자만요?
-아, 네. 그냥 간단히 해 주시면 돼요.
-간... 간단히요? (간단히가 어디서 온 말인지...) 그거, 작년에 찍어 놓은 영상 있지 않나요? 그거 보여 주셔도...
-그게.. 수업하는 영상이 저장이 잘 안 됐더라고요.
-어, 저, 있어요! 저는 그 영상 저장해 놨거든요!! 그냥 그걸로 퉁, 치면....
-(선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냥 한번 살짝 해 주시면 될 거예요. 부담 갖지 마시고요.
안다. 난 끝내 이곳을 다녀야만 할 것이다. 우선 내 사정을 살펴보자. 대체 뭐가 있는가? 없다. 쥐뿔도 없다. 무조건 다녀야 남는 거다. 하고 싶은 다른 일을 하려면 다녀야 한다. 독립출판물도 계속 만들고 싶다. 그러니 다녀야 한다. 소소하게나마 책 편집 일도 계속해서 하고 싶다. 그러니 다녀야 한다.
게다가 가족들이 지켜보고 있다;;;
다녀야 한다. 나도 안다. 아는데도 나는..
계속 기회를 노리며 눈치를 살피고 있다. (어떤 눈치냐고?)
어떻게 하면 다시 또 이곳을 빠져나가 볼까, 하고...
호시탐탐 그 기회를 노리는 중이다.
(이눔의 퇴사 DNA는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온다.)
수차례 백수를 겪고도 재입사 일터에서마저 또 백수를 꿈꾼다. 그 백수의 끝이 얼마나 허망할지, 돌고 돌아 또다시 지금처럼 '재입사'의 결과일지도 모르면서 난 또다시 일탈을 꿈꾼다. 물론 언젠가는 지금의 이 재입사도 끝이 날 것이다. 어쩌면 예기치 않게 정부에서 지원을 끊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이곳은 이제 다니고 싶어도 못 다니는 직장이 될 수도 있다. 직장이라는 세상은 그렇게, 끝나거나 끝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저절로 끝나든 내가 끝내든 엔딩이라는 것이 없을 리는 없다. 그러니,
먼 훗날, 이 재입사가 타의 혹은 자의로 조기종영이나 촬영 중단, 폐지 등의 수순을 밟게 되더라도 우선.. 내 발 앞에 떨어진 불똥을 잘 들여다보자. 그 불똥에 타 버리지 않으려면, 지금은 이 불똥을 잠재우는 수밖에 없다. 손으로 끄든 발바닥으로 비벼 끄든 우선 급한 불은 꺼야 한다. (일하는 동안만큼은 어찌 되었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이다.)
그래, 까짓것 잘하든 못하든 하긴 해 보자.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나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해서, 오로지 나를 위해서, 다시 무라도 한번 썰어 보잔 말이다.
어쩌면.. 난...
무 하나를 제대로 썰어 보기 위해 이곳에 다시 돌아온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