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재입사]
엊그제쯤엔 무라도 썰기로 다짐했었는데....
나는 지금 무는 안 썰고 그 대신 세월만 썰고 있다. 아주 동강동강 세월과 시간을 낭비하면서, 재계약이 끝나고 다시 또 새 계약이 시작되려는 이 겨울 앞에서 나는 세상과 어깨동무를 하며 영하의 추위를 함께 견디고 있다.
‘어라. 그런데 이게 뭐지?’
재입사하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고, 생전 안 해 본 카메라 마사지까지 받으며 강제 성장을 해 왔다고 그나마 위로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휙 뒤돌아봤더니, 이상하게도 난 제자리였다. 몇 번의 출루와 몇 번의 안타. 이 재입사라는 운동장에서 베이스를 밟으며 몇 바퀴 돌고 돈 것 같긴 한데 나는 이상하게도 늘 그 자리. 타점 없이 방망이만 휘두른 느낌이었고 관중의 환호는 다른 사람들 차지인 것만 같았다.
다른 분들이 온라인이라는 한계를 딛고 한 명 한 명의 아이들과 소통하며 '오~ 오이구 잘했쪄요. 이 반 정~~말 잘한다. 몇 반이야, 몇 반~~ 똑똑해, 똑똑해!'라는 문장을 건넬 때, 나는 그런 억양이 못내 쑥스러워서 아이들 눈 대신 카메라의 눈을 바라보면서 웅얼웅얼 1년을 보냈다.
'그래도 애썼어, 애썼어' 나를 토닥여 봤지만 나의 못난 점을 여실히 확인해야만 하는 한 해였다. 목소리가 빠르다, 재미가 없다, 뭐라고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 내가 내 영상을 보면서 스스로 깨달아야만 했던 현실들이었다. 자아성찰하는 능력만은 탁월해서 한 해의 뒷맛이 참 씁쓸했다. (카메라 화면 한가득 하품을 크게 하던 그 소녀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앞으로도 어린 친구들에게 하품을 선사할 것만 같다.)
마구잡이로 흐르던 국어 강사로서의 시간, 어느 순간 돌아보니 난 '도돌이표 앵무새'가 되어 버렸고, 내 앵무새 수업 탓인지 카메라 감독님마저 수업 도중, 카메라 대신 자기 휴대폰을 쳐다보고 계셨다. 그러다 나의 수신호를 못 알아차리는 사태까지 일어나기도 했고. (다음 강의 화면을 잡아야 하는데 내 얼굴, 내 콧구멍만 잡고 있던 카메라 렌즈여...)
나의 한계였을까, 재입사의 한계였을까. 얼마 해 보지도 않고 고민이 늘고 고심이 깊어졌다. 이런 고심의 결과를 딱 두 글자로 표현하자면……. 탈진.
나는 어느 순간 진이 빠졌다. 내 안의 재생 기능이 삐거덕거리고 내 몸과 마음의 진이 다 말라 버리는 느낌이었다. 소진 혹은 탈진. 쳇바퀴 돌 듯 돌려 막는 내 감정의 쳇바퀴들. 나는 그새를 못 견디고 재입사에 '지옥'의 딱지를 붙이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내 마음이 다 타버렸다. 재입사의 '재'는 내게 '다시 한번'이 아니라, 소모되어 버리고 타 버리는 '재'와 같은 글자에 불과했다.
감정과 지식의 누수가 내 삶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다. 내게 오는 모든 강의를 막지 않겠다고 신청이 오는 대로 다 해 보겠습니다,라고 처음에는 과도한 의욕을 앞세웠다. 아니, 의욕보다는 책임감이었다. 힘을 빡 줬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고 내 표정에, 내 잇몸에까지 힘이 과도하게 주입됐다. 말은 빨라졌고 스트레스의 주기도 빨라졌다. 그간 내 몸에 너무 힘을 줬나 보다. 마음에도 군기가 바짝 들었다.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재입사라는 도구만 세차게 휘둘렀나 보다. 갑자기 이 모든 게,
어쩐지 좀 허무해졌다.
대충 일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조차 잊고 그 '대충'도 하기 싫어졌다. 그 '대충'도 이 일에 내어주기 아까웠다. 내 의지는 자꾸 지옥으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혹시, 바이러스가 몰래 나를 좀먹고 있는 건가? 무... 무기력 바이러스??
무기력 바이러스에 정신을 못 차리며 후유유유유, 거리고 있는데 휴대폰에서 알림이 울린다. 뭐지? 응??
으으으으????응?? 뭐여, 이거 피싱 아니야? 왜케 숫자가 많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가 방금 급여를 확인해 봤는데요, 뭔가 잘못된 것 같아서요.
12월에 수업이 얼마 없었는데 2배가 훨씬 넘는 돈이 찍혔더라고요.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그날은 12월 31일이었고, 잔액을 확인하다 말고 잠깐 기뻤으나, 아무리 그래도 두 배, 아니 세 배에 가까운 돈이 지급될 리가 없다는 양심의 소리를 따르며, 담당 선생님께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먼저 말씀을 못 드렸네요. 수업 기준이 변경되어 일전에 누락되었던 수업과 12월 수업이 급여액 산정에 포함되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상반기에는 수업 진행도 못 했었고, 급작스럽게 온라인 수업으로 변경해야 했음에도 강사님들이 너무 고생을 많이 해 주셔서, 기존 강사료 책정 방식을 변경하여 강사님들께 급여를 더 드릴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착오는 아닙니다~! 따뜻한 연말연시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20년 12월 31일, 봄먼지 나라에 갑자기 백신이 도착했다. 그 백신으로 인해 당분간 나의 이 '무기력 바이러스'는 자취를 감출 예정이다.
"오늘 맥주 마셔야겠네!"
백신 수급 정책(초과 급여 정책)을 알리자마자 아버지가 잔치를 제안하신다. 스트레스 용량 초과로 무기력에 허덕이던 나,
이런 용량 초과는, 정말이지, 언제든 두 팔 벌려 대환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