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재입사
-오, 선생님! 가족분들과 스페인 여행은 잘 다녀오셨어요? 저는 이 직장에 그럭저럭 적응하고 있답니다.
카톡을 보낸 지 3일, 4일,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지만 답장은 없었다. 진즉 여행에서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이었지만 그녀는 답이 없다. 여행이라고는 일본여행밖에 안 다녀온 나로서는 유럽물이 어떤 물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난 그녀에게서 그 후로 단 한 번도 스페인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스페인 소식은커녕 그녀의 안부조차 모른 채 몇 해가 지났다. 물론 카톡 옆에 덩그러니 놓였던 숫자 '1'은 사라진 후였다.
-봄먼지 선생님, 만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이런 말씀드리기 좀 그런데..
-아, 네. 선생님. 말씀하세요.
-저, 사실 선생님이랑 하루 이틀 같이 붙어 다니면서, 어쩐지 선생님이랑 뭔가 코드도 맞고, 저랑 선생님이랑 뭔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앗.....
그녀의 고백 아닌 고백에 내가 '앗'이라고 외마디 탄식(?)을 질러 버린 이유는, 나도 그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도 묘하게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니, 무슨 남녀 사이도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드나, 싶겠지만 사회에 나와서 이렇게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가 있을 수 있나, 싶었다. 그것도 삼일밖에 보지 못할 사람, 앞으로 만날 일이 있을까, 싶은 사람이었는데도.
-아, 저,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었네요. 선생님도 저처럼 학습부진강사도 했다고 하시고, 저처럼 무한도전 광팬인 데다가... 생각하시는 게 저랑 좀 비슷하시고.. 게다가 저 여기 일,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렇게나 자세히 알려 주셔서 넘 고맙더라고요.
나는 평소 내게서 인연이 사라지는 걸, 그냥 두고 보는 축에 속한다. 옷깃만 스쳐도 옷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십 년에 한 번쯤 이 사람, 뭔가 나랑 통하는 느낌이다, 싶은 사람이 생기긴 한다. 3일만 보고 그걸 어떻게 눈치채느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는데 그땐 그랬다. 나처럼 인간관계 젬병인 사람도 묘하게 감이 오긴 한다. 일 때문이었지만 온종일 그녀와 붙어 다니면서 나는, 그녀도 나와 유사한 종족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왔다. 아, 이 사람, 좀 내 과다, 싶은 그런 느낌.
-선생님도 느끼셨구나.
-그러게요. 신기해요. 선생님도 느끼셨구나. ㅎㅎ
-저, 봄먼지 선생님이 면접 보시던 날, 제가 안내해 드렸잖아요? 그때 오신 세 분 가운데 봄먼지 선생님이 합격하시길 바랐어요. 저도 모르게 선생님한테만 그때, 파이팅, 이라고 외쳐 드렸던 것 같아요.
나와 이런 대화를 나눴던 그녀는 바로 J.
J는 나와 갈등을 겪은 M선생의 이전 파트너다. 다시 말해 J는 내 전임자였다. 이곳에 처음 입사할 때, 나에게 인수인계를 아주 친절히, 지나치게 상세히 해 주던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이 체험할 때 사용하는 태블릿을, 평소에는 잠금장치에 잠가 두고 충천을 하는데, J는 태블릿 로고를 어느 쪽으로 돌려놓아야 쉽게 충전할 수 있는지까지도 상세히 다 알려 주던 사람이었다. J는 1부터 10까지 나에게 모조리 다 알려 주고 싶어 했다. 어쩐지 좀 나 같은 사람이었다.)
-사실 선생님이 여기에 지원해 준 덕분에 제가 이번에 처음으로 가족여행 가는 거예요.
-오, 정말요?
-가족끼리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좀 가 보려고, 여기 다니면서 휴가 좀 내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어요. 그래서 아예 관두고 가는 거예요.
그 선생님은 내가 입사를 한 덕분에 가족과 여행을 가게 되어서 좋았고, 나는 그녀가 퇴사를 한 덕분(?)에 돈을 벌고 취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사람도 좋고 일도 좋고... 아, 맞다. 그런데 이 사람이랑 나랑 같이 일을 할 수는 없는 거구나. 3일만 보면 여기서 끝이겠지?
J와 달리 M은 처음부터 어쩐지 인상이 매서워 보였다. '아, 차라리 J와 같은 팀을 이뤄 계속 일을 하는 사이라면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언뜻 스쳤다. M이 유독 J에게 냉랭한 것도 유독 마음에 걸렸다. 이곳에 처음 온 나조차도 그들의 다소 일그러진 관계가 적게나마 느껴졌다. M과 J는 무슨 문제가 있기에 저런 걸까. 저 M이랑 나, 과연 잘 지낼 수 있을까.(괜한 기우일 줄 알았는데 M과 나의 관계, 그 이후 결국엔 폭우였다, 폭우.)
-저희, 오늘 인수인계 끝나서 이렇게 헤어지기는 하지만 나가서 꼭 연락해요.
-네, 선생님. 꼭 그래요, 저희.
J의 인사에 나도 아쉬운 악수를 나누며, 그녀와의 인연이 단 3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J가 가족여행에서 돌아온다던 날짜 즈음에 '미친 척' (나는 낯선 누군가와 친해지려고 노력하지 아니하는 사람이라서 이건 정말 나에게 '미친 행동'과도 같은 것이었다.) 카톡을 해 봤다. 잘 지내시냐고, 여행은 잘 다녀왔느냐고. 저는 여기서 억지로 억지로 적응하는 중이라고.
하지만 나의 그 첫 카톡이 J를 향한 마지막 카톡이 되었고 그때로부터 만 4년간 J에게서 답장은 없다. 그사이 나는 휴대폰이 바뀌었고, 연락처 백업을 한다고 했는데도 몇몇 사람의 연락처가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그 증발한 인연들 속에는 J도 포함돼 있었다.
어땠을까.
그녀 J와 내가 이 직장에서 혹시 파트너로 쭉 함께했다면?
어땠을까.
J가 나에게 '우리 좀 잘 통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J가 내 카톡에 답장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J가 가족여행을 위해 직장을 관두려는 선택을 안 했더라면?
어땠을까.
J가 M과 엄청난 갈등으로 관둔 것을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M과 J가 사이좋은 동료였다면 (나는 재입사도 입사도 없었을까)?
어땠을까.
내가 만에 하나, M과 갈등을 겪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재입사 일터에서 혹시 M을 다시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J와 M이, 그리고 나와 M이 서로에게 '진저리'가 아니었더라면?
어땠을까.
어땠을까.
어땠을까.
어땠을까.
J가 내 카톡에 답장을 하지 않은 이유를 이젠 안다. 내가 같이 일해야 할 사람은 M이었고, M은 J의 퇴사 이유였다. 돌이켜보니, J가 답을 안 해 줘서 사실 나는 고마워해야 하는 거였다. (J가 떠난 후, 나는 M에게서 J에 관한 후일담, 혹은 뒷담화를 들어야 했으므로, 가끔은 어쩔 수 없이 M의 그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여야 했으므로...)
어이, J 선생.
이 글이 돌고 돌아 혹시라도 당신의 손안에 요행히 닿는다면,
우리, 같이 만나서 진한 커피 한잔, 아니 진하게 맥주 한잔이라도 하면서,
허심탄회 회동이라도 한번 해 봅시다.
(M으로 힘들었던 서로의 마음도 털어놓으면서 말이죠...)
그나저나 퇴사 후 그 스페인은 어땠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