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만요, 또 재입사요?

[돌고 돌아 재입사]

by 봄책장봄먼지

-다른 사람한테 연락을 하기 전에 잠깐만, 해 놓고 봄먼지 씨한테 먼저 연락을 한번 해 본 거야.


언젠가 자신이 출판사를 차리게 된다면 나와 같이 일해 보고 싶다고,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그러고 싶다고 진담 반 농담 반의 말씀을 건네주신 팀장님이 계시다.


-봄먼지 씨, 관리 들어갔어.

-크크. 관리해 주세요. ㅎㅎ


피부 관리든 학점 관리든 평생 '관리'라곤 받아 본 적이 없는 나인데, 나를 좋게 봐 주신 팀장님.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귀한 인연이라 나는 그분이 참 감사했다. 그분은 바로, 내가 출판사 아르바이트를 할 때 만났던 편집디자인 팀장님.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 고작 3~4개월짜리 수명의, 그 나이 든 봄먼지 알바생에게 밥도 사 주시고 좋은 말씀도 많이 해 주시고, 내 인생을 안타까워도 해 주시고 응원도 해 주셨던 분이다.


-그 출판사를 관뒀었는데 다시 부서장으로 와 달라고 해서 다시 들어갔어.

-와. 팀장님, 그러면 다시 스카우트되신 거예요?!! 멋져요!!

-하하. 그런 셈인가.


이렇게 카톡을 나눴던 게 1년여 전. 그런데 그 팀장님께서 갑자기 지난주, 이 봄먼지에게 문자와 전화를 주셨다.

-우리가 새로 부서를 만들려고 해. 외서팀이야.

-그런데 제가 외국어를 못해 가지고요;;

-아, 외국어 필요 없어. 번역팀이 따로 있거든. 그럼 혹시 생각은 있어?


일주일 동안 머리가 정말 너무 아팠다. 내 인생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조짐이 들어서였는지... 제안을 받은 그 일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다. 자신은 없지만 먼 훗날 '자신 있을 나'를 위해서 꼭 한 번, 영혼을 끌어모아 나 자신을 내놓고 싶은 일이다. 하지만...


1. 올 연말까지 나는 계약이 되어 있는 몸이다. 프리랜서 강사로 재입사한 곳이라 중간에 관둘 수가 없다. 의리와 예의 때문에. 게다가 그곳은.. 힘들 때마다 내게 경제적인 앞가림을 틔워 준 '정말' 고마운 곳이기도 하다.


2. 지금 나는 다른 곳과도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는데 그곳도 차츰 자리를 잡아 나가고 있는 중이다. 고진감래라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조그마한 인정을 점점 받고 있다.


3. 그런데 새로 일하게 된다면 장소가... 장소가 파주다. 출근 시간만 2시간 30~40분이 걸린다.. 후덜덜이다. 게다가 제안을 받은 그곳은 8시부터 일을 하는 곳이다. 새벽 5시 30분에는 집에서 나가야 한다. 내가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몇 개월 해 봐서 좀 안다. 틀림없이 체력이 방전된다. (그때보다 네 살쯤 더 늙은 나는 그 9시간의 고강도 노동과 장거리 출퇴근을, 분명 견디기 힘들 것이다.)


4. 혹시라도 그곳에 다니게 된다면 방이라도 한 칸 구해서 지내야 할지도 모르는데 여건이 허락할는지가 문제다. 가족들은 그렇게 해서라도 다니라고 하는데 문제는..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아닌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거기 가면 평일이 없다. 평일 저녁도 없고 평일 밤도 없다. '나' 자신이 없어질.. 소멸될 위기에 놓일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5. 내년이면 우리 귀여운 쌍둥이 조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하교 시간에 학교 앞에서 반가이 쌍둥이들을 맞이하는 그 일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백 퍼센트다. 엄마도 아닌 이모이면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유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조카들이 훗날 기억을 하든 안 하든, 조카들의 중요한 역사의 마디마디에 함께하고 싶은 게, 함께해 주고 싶은 게 이 봄먼지 이모의 마음, 혹은 욕심이다. (그래서 지금도 7년째 몸이 바스러져라 조카들과 틈이 날 때마다 놀아 주는 것이고...)


6. 그리고 부모님을 지금처럼 돌봐 드리기가 힘들 것이라는 점.. 지금은 평일 대낮에도 부모님과 함께 산책을 간다. 가끔은 도시락을 싸서 소풍도 간다. 차를 마시고 뻥튀기 간식을 먹는다. 부모님이 즐겨 들으시는 '향수', '가시나무', '바람이 분다', '그리움만 쌓이네' 등의 노래를 선곡해 드린다. 잡다한 이야기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부모님을 웃게 해 드리고, 나도 그 덕분에 많이 웃는다. 절로 절로 힐링이 된다. 그러나 그곳에서 일하게 되면 '성장 200% 보장'인 반면 이런 시간들을 놓치게 된다. 병원도 늘 같이 가 드리고 심부름도(카톡 글 대신 쓰기 같은 자잘한 심부름도) 많이 해 드렸는데 거기에 가면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정말 좋은 기회인데 지금은 제가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저를 생각해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결론적으로 지금은 할 수 없다고 말씀을 드렸다. 올해는 계약이 되어 있고, 따로 하는 편집 일도 네 권이나 밀려 있다. 나만의 욕심을 내기에는 상황이 허락지 않는다. (욕심을 내려는 용기가 내게 있는지도 아직은 잘 모르겠고.)


-요번엔 뭔가 기회의 타이밍이 안 맞았다, 그치? 그래도 내년에라도 혹시 자리가 있으면 올 수는 있는 거잖아, 그치? 그 강사나 그 다른 일을 관두고라도 올 수는 있는 거지?


네,라고 대답은 했는데 돌아서서 생각해 보니 잡다한 다른 생각들이 자꾸 많아진다. 이 생활이 이대로 좋기도 하고, 저 생활로 얼른 건너가고 싶기도 하다. 안전지대에서 벗어나서 도전하고 싶기도 하고, 내가 모르는 영역에서 힘껏 부대끼면서 깎이고 채이며 성장해 나가고 싶기도 하다. 아니, 지금처럼 적게 벌더라도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기도 하고..



-봄먼지 씨가 알바했을 때보다 우리 회사가, 규모도 엄청 커지고 더 좋아졌어. 내가 봤을 때는 분명 봄먼지 씨가 같이 와서 일하게 되면 봄먼지 씨가 많은 경력을 쌓을 수 있을 거야. 내가 그거는 보장하니까. 나쁜 거면 내가 전화도 안 해. 나도 봄먼지 씨가 와 주면 믿고 맡길 수 있는 부분이 있으니까. 나도 당연히 먼지 씨와 일하고 싶지. 일단 지금 당장은 안 되겠다, 그치? 그래도 나중에라도, 계약 끝나는 내년 초에라도 여기 올 생각은 있다고 하니까 나도 잘 참고해 두고 있을게.



팀장님과 전화를 끊으며 온갖 생각이 많아진다. 머리는 계속 지끈지끈. 지금 온 1차 기회는 사라졌다. 아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하다. 나를 담금질한 시간을 마련했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의 소중함을 한 번 더 돌아보게 됐다.


내년 초가 되어서 혹~시라도 다시 연락을 주신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 전에 없던 두통이 나를 옥죄어 온다. 몇십 년 만에 살다 살다 내가 이런 고민을 다 해 본다.(그간 나를 뿌리치는 세상 속에서만 살았는데.. 나의 손을 잡아 준다는 세상이라니..)


알바생에서 전격 정규직 재입사.

살다 살다 재입사 제안을 두 번이나 받을 줄이야.


그런데 그런 기회가 정말 내게 찾아와도 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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