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거기 다시 다닌다며?
[돌고 돌아 재입사]
응. 다시 다녀. 여전히 정규는 아니고 계약. 아니 이건 계약직보다 못한가? 프리랜서 강사.
수업?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고. 그렇지. 예전 벌던 만큼은 안 되지. 어쩔 수 없어. 그래도 시간은 자유롭게 써.
다시 나가니까 어떠냐고?
이게.. 처음이 중요한 게, 강의 딱 시작할 때 3,2,1초 전... 땡! 카메라 불 들어올 때 엄청 긴장이 돼. 게다가 카메라 감독 앞에서 강의를 할 때는 무슨 면접시험 보는 것 같다니까. 두세 사람이 날 막 쳐다보고. 딱히 나를 보는 게 아니라 그네들도 그냥 딴청을 피울 수는 없으니까 그냥 쳐다보고 있는 걸 수도 있는데, 내가 좀 오버해서 긴장하는 편이라.
아, 왜 처음이 중요한지 말하다 말았구나.
왜냐면.. 처음에 안녕하세요, 를 잘해 버리면, 그다음 대사가 그래도 기억이 나더라고.
"안녕하세요. 저는 ****원 강사 누구입니다. **초등학교/중학교 여러분, 반갑습니다."
일단 인사를 잘 트고, 활동 소개를 간략히 한 후에 화면을 보며 수업을 시작하면,,
거기서 일단 반은 먹고 보는 거야.
시작이 반이라는 말, 거짓말은 아니더라.
첫 테이프를 잘 끊으면 그다음이 나와.
어떻게 나오냐고?
그다음부터는 연습한 대로 아무 말 대잔치를 하게 돼. 아무 말 대잔치면 어때. 그것도 잔치잖아. 잔치 도중에는 뭐가 잘못됐는지 잘 됐는지 꼬치꼬치 캐물을 형편이 아니잖아. 잔치 끝날 때까지 나도 아이들도 그냥 잔치 속에서 하품도 하고 질문도 하고 대답도 하고 그러는 거지.
돌이켜보면 나는 '처음'이 중요한 줄을 몰랐어.
재입사 때 말고 처음 입사 때 말이야.
세상에 너무 주눅 들면서 살던 때라, 여기 들어온 것만 해도 좀... 감개무량했다고 해야 하나, 감지덕지였다고 해야 하나.
그년이, 아 미안. 그녀가, 나랑 같이 일한 애 있잖아, 왜. 이건 그녀가 나랑 갈등 있기 전에 해 준 말인데,
나 포함 세 명이 면접을 왔었고, 한 명은 날카로운 인상이었고 한 명은 보통 인상이었대. 나? 나는 뭐 보나 마나 순한 인상이었겠지.( 꼭 그렇진 않다고?)
그녀는, 같이 일할 사람으로서, 즉 동료 면접위원으로서 나 같은 면접 대상자들을 평가하라는 건의를 뿌리치고서 면접장 한쪽 귀퉁이에서 면접위원들과 조금 떨어져 앉아 있었어.
그런데 날카로운 인상인 1번 지원자가,
구석에 앉은 그녀를 보고 (자기랑 같이 일할 사람인지도 모르고)
-ppt 포인터가 안 되는데요?
라면서 약간 거만하게 손짓을 하더래. 표정도 좀 그렇고. 그녀는, 자기를 마치 하인 부리듯 하는, 그 면접자의 태도가 꽤 거슬렸었나 봐.
2번 지원자?
2번 지원자 이야기는 잘 기억이 안 나네.
그냥 어디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이라는 이야기만 들었어.
꽤 잘난 사람이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3번. 내가 바로 3번 지원자였어.
수업 시연 때 너무 떨려서 다시 할게요, 제가 왜 떨죠, 따위의 말도 안 되는 자문자답으로 시연을 망친 후 앉아서 면접을 보는데, 그래도 앉아서 면접 볼 때는 좀 덜 떨렸어. 할 말을 하긴 했어.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질문 중에 '사람과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겠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그게 1년 8개월 후 나를 찌르는 질문이 되어 돌아올 줄을 정말 꿈에도 몰랐던 거지.
그녀는 이미 나 이전에 한 사람을 갈아치운 전력이 있었거든.
내가 그걸 모르고 황천길에 제 발로 들어간 거야.
아무튼 이야기가 딴 데로 샜는데.
처음이 중요한 거였어.
첫 사람. 첫인상.
내가 너무, 처음부터 '무릎'으로 들어갔던 거야. 무릎이 뭐냐고?
무릎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너무 낮은 자세로 들어갔다고.
면접장 저 뒤편에서 내가 수업 시연 망치는 걸 고스란히 그녀가 다 봤거든. 그래서 내가 만만했겠지. 저런 애, 그러니까 나 같은 애를 뽑았을 때는 이유가 있는 거였어. 청소년 경력은 조금 있지만 학력이 좀 안 되는데 왜 나를 뽑았겠어. 그녀랑 갈등 없이 잘 지내보라는 뜻이었던 거야. 내 전임자의 퇴사 사유가, 바로 '그녀'였거든.
좀 말 잘 듣고, 트러블 없이 일할 것 같고,
하자는 대로 하면서 자기 뜻대로 이 사업을 진행해 볼 수 있는, 뭐 그런 사람.
한마디로 조금 호구스러운 사람.
그게 바로 나야.
아무튼 이곳에서 첫 테이프를 잘못 끊었어. 그래서 그렇게 늘 질질 끌려다녔고,
내 주장도 의견도 제대로 못 펼쳤나 봐. 말해도 되는 거였고, 말한다고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닌데.. 혼자 지레 의기소침해서는..
그러다 보니 늘 뒤편, 뒷전에서 남이 해 놓은 거 주워 먹는 사람이 되어 버렸어, 어느새. 나도 그런 사람 딱 질색인데 어느새 내가 딱 그런 사람이 되어 있더라고. (그럼 나도 나를 미워해야 하는 판국인 건가?) 능력 없이 남의 뒤에서 자기 할 일은 아주 소량만 하는, 염치없는, 월급루팡 같은 사람.
그녀가 루팡루팡, 그런 이야기 참 많이 했지. 일 잘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찬양하던 그녀는 끝내 나 같은 사람은 존경도 존중도 할 수 없었던 거지, 살다 살다 나처럼 일 못 하는 애는 처음 봤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 지금쯤 나 말고 나 같은 다른 사람들, 많이 만나 보지 않았을까? 세상에 자기 일 제대로 못 하는 사람, 몇 명쯤은 있잖아. 그녀도 제2의 봄먼지를 만났겠지. 자기 성에 차는 사람만 만날 수는 없는 법일 테니까.
그녀만 남고 나만 떠날 줄 알았던 곳에서, 희한하게도 그녀는 떠나고 내가 다시 돌아왔어.
돌아온 사람이 승자냐고? 아니, 재입사하는 것보다 보란 듯 성공, 이게 진짜 승리하는 거겠지.
꾸깃꾸깃 쭈뼛쭈뼛, 퇴직 인사 나눴던 사람들 얼굴을 다시 대면하는 게 뭐 좋다고 '승리자'겠어. 승리자가 아니라 '패배자'라고 해야 할지도. 혹은 '패배 근처에 간 사람'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잘 모르겠어.
지금이 좋은지 안 좋은지.
인기 있는 강사 되고 싶은 생각 추호도 없었는데
인기 없는 강사가 되어 버리니까 그건 그것대로, 내 예정에 없던 일이라 마음이 성성하게 빈 느낌이야.
왜 인기가 없냐고?
난들 아나. 만족도 조사 결과가 그렇게 나왔다는데.
그러지 말고 지금 나오라고?
전화하다 말고 어딜?
꿀꿀하지 않냐고?
야, 확진자 1000명 시대야. 나가긴 어딜 나가. 다들 자제하라잖아.
뭐? 거기 계속 다닐 거냐고?
글쎄.. 어떻게 해야 할까.
재입사 후 2년 동안 이 직장 덕분에 잘 벌어먹긴 했는데 솔직히 많이 부대끼긴 했었어. 야, 지난번 위내시경 검사, 내 위에서 용종 세 개가 왜 생겼겠어. 1,2년 동안 온라인 수업으로 바뀌면서, 또 사람들 앞에 나서는 역할을 많이 하게 되면서 몸이 좀 놀란 것 같아. 생전 잘 안 먹던 '극성 스트레스'를 좀 많이 먹었어야지.
어쩌면..
재입사도 슬슬 막을 내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아.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고.
아니, 회사 측에서 나를 먼저 싫다고 할지도 모르지. 인기 강사도 아닌데, 뭐.
쩨쩨하게 자꾸 인기 강사에 연연할 거냐고?
안 그러려고 하는데 그런 말이 튀어나와 버렸네 핫...
아무튼 끊자.
더 들어 주다가는 네 귀에서 피 나겠다.
네 귀는 소중하니까.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한다고? 뭔데? 다 잘될 거라고?
그런 애매한 말 따위는 하지도 말고 넣어 둬.
세상에 '잘되는 것' 따윈 없어.
그저 잘 안 되는 것만 아니고 그저 무사하기만, 무탈하기만 해도 감사해야지. 내 삶이 요즘 그래.
어, 알았어. 기운 낼게.
다음에 또 연락하자.
그래, 너 같은 백수랑 나 같이 조금밖에 못 벌어먹는 반백수랑 나중에 코로나 뜸하면 만나서 산책이나 하자고.
응~응~ 끊어.
그래,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