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돌아 재입사]
겨울잠 같던 낮잠들을 깨부수고, 어제의 발표불안들도 다 던져 버리고, 나는 어느새 새로운 학기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금은 2021년 1학기 수업의 후반부 즈음. 난 어제 중학교 남자아이들과 수업을 했다. 그동안의 ZOOM 수업은 남녀공학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여중'을 대상으로 체험을 한 적은 있었어도 '남중'을 대상으로 수업하기는 처음이었다.
'아이들이 대답을 잘 안 하면 어쩌지?'
중학생 수업을 앞두고는 늘 염려가 앞선다. 초등학생들에 비해 말을 안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 홀로 수업이 되려나, 하는 찰나,
"정식으로 인사드릴게요. 저는 ****원 강사 봄먼지입니다. **중학교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중히 고개 꾸벅)"라고 말하자마자, 남자아이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치며 나를 환영해 준다. 게다가 묻는 말에 대답도 넙죽 잘해 준다. 교실 분위기가 정말 좋다. 나의 걱정은 그야말로 기우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어제는 수업하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오랜만이었다. 나도 신났고 아이들도 신났다. 물론 아이들은 조금 있으면 하교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더 신바람 난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기분이 천정부지로 치솟던 나였는데.. 오늘 직장으로부터 하나의 공지사항이 전달된 후로는 급반전.
<온라인 참관 수업>
상반기 수업이 종료되기 전, 지난 3개월간 참여 학생 대상 인기 많았던 *** 선생님 참관 수업을 진행합니다^^
- 일정: O월 O일(월)~O일(화) 양일 중 택1
- 대상: 강사 2인
참관 시 아래 요소를 주의 깊게 관찰하시어 하반기 수업에 적극 반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래 체크 요소를 중심으로 각자 메모하며 참관록을 작성하시면 교육 시 도움이 됩니다.
[체크 요소]
1. 수업 목표 및 주제 제시
2. 강사-학생 간 상호작용
3. 목소리 크기와 말하는 속도
4. 적절한 칭찬과 격려
5. 학생 수준을 고려한 공감도 높은 예시
6. 학습내용 전달-학생과의 소통 사이 적절한 수업 시간 배분
7. 수업 마치기 전 주요 학습 내용 확인
8. 만족도 조사 참여 안내
++ 교육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상반기 수업을 마치며 온라인 참관 수업을 실시한다는 공지다. 1학기 동안 참여자들에게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모 선생님의 수업을 한번 참관해 보고, 체크리스트를 참고하여 참관록을 작성해 두라고 한다. 그것을 참고하여 2학기 수업에 잘 적용해 보라는 이야기다.
1번부터 8번을 쭉 훑어내 린다.
1번. 나는 어떤 활동인지 제시만 했지 수업 목표까지 뚜렷하게 제시하지는 못했다.
2번. 상호작용보다 내 수업 진도 나가는 일에만 급급했다.
3번. 목소리 크기는.. 나도 의외로 크긴 하지만, 말하는 속도가 너무너무 빨라서 지적을 받곤 한다.
4번. 적절한 칭찬과 격려? 나도 칭찬은 좀 했다고 생각했는데 남 보기에는 부족했겠지.
5번. 그걸 일일이 맞추기가 참 힘들더라... 핑계인가.
6번. 적절한 시간 배분. 나 홀로 마이웨이 수업이었던 적도 많았던 것 같다.
7번. 수업 마치기 전 학습내용 확인? 시간 없을 때는 그냥 넘어갔다. 시간 맞춰 끝내기에 급급.
8번. 8번이야 뭐..
저 모든 항목이 나에게 꽂는 어떤 비수같이 느껴진다. 저 항목들 가운데 내가 잘하는 것은 8번뿐인 듯하다.
그냥 뭐랄까, 1학기 동안 그 나름 애썼는데 초라한 결과지를 받아 든 기분이다. 재입사를 할 때는 관련 체험에 관해 아는 게 거의 나뿐이어서 사람들이 나에게 묻거나 의지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재고용한 그들도 알았고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강사'에 최적화된, 아니 적합하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나를 쳐다보는 이들이 많을수록 긴장을 한다. 능숙한 척 체험을 설명하고 수업을 해내는 일이 내겐 너무 어렵고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아마 그들도 나를 택한 것에 스스로 고개를 갸우뚱거려야 했을 것이다.
못하는 일을 꾸역꾸역 1년 8개월이나 이어왔으면서, 어쩌자고 나는 또 '재입사'라는 선택을 했던 걸까. 시계를 2020년 2월로 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와중에 내 수업을 다른 강사님들께서 참관하는 게 아니어서 덜 부담스러우니, 그건 또 다행이다. 이 무슨 이중심리냐마는..)
수업이 많지도 않고 많지 않은 수업을 세 사람이 나누어 하는 형편인데 내년에도 이것을 계속해서 해야 하나, 무엇보다도 내가 잘하지 않는 일, 내가 좋아하기는 좀 힘든 일을 계속해야 하나, 고민이 앞선다. 후유. 이젠 누가 오라는 데도 없는데.. 차라리 깨지고 부수어지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깨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그건 나를 위한 내 선택일 테니까.
이 일. 사람이 뭔가 사회구성원으로서 무슨 역할 부스러기라도 하고 있어 보이니 가족들도 내가 이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공공기관이라는 점에서 신뢰감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나 역시 그렇다. 급여가 밀리는 일도 없고 적절한 대우와 처우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되도록 강사를 배려해 주려고 애쓰는 기관이고 업체다.
재입사. 나한테는 참 평안감사 같은 일이다.
그러나... 이젠 그 평안감사가 감사하지가 않다.
성은이 망극하다는 듯 감지덕지하던 재입사 초반의 나는 증발해 버렸다. 어쩐지 이 성적표 앞에서 나, 더는 열심히 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나, 프리랜서로의 재입사,
과연 잘한 선택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