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해도 문제

[돌고 돌아 재입사]

by 봄책장봄먼지

내가 좀 이 일을 못하는구나,를 어제 혹은 그제 혹은 매일매일 깨닫고 있지만,


자고 일어났더니 그것도 아득한 먼 과거 같다. 나는 기억력이 약해서 종종 과거를 잊는 편이다. 오늘도 그러기로 하고 새벽에 일어나 수업 준비를 했다. 수업 시간이 오후 1시 45분~2시 30분인 관계로 매 시간 45분들에 맞춰 수업을 준비했다.


다른 선생님의 장점을 참고하라는 지난번의 그 참고 리스트를 말 그대로 '참고'하기 위해서 zoom으로 녹화한 나의 연습본을 다시 살펴봤다. 말을 뭉개는 버릇이 어느새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고, 말의 속도는 너무 빠르다. 아주 번개가 지나가는 듯해서 내가 아이들이었어도, 내가 내 수업을 지켜보는 학교 선생님이었대도 '저게 뭔 소리여.' 했을 것 같다.


그래,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앞으로 나아가야겠지.



나는 펜을 쥐고,

"천천히"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이라는 붙임쪽지를 모니터에 붙여 놓고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오늘 우리는 사전을 탐험해 보려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이 말을 꼭 해야겠다, 이 부분에서는 인터넷을 같이 활용하면서 해 보자고 해야겠다, 저 부분에서는 아이들에게 질문도 좀 해야겠다, 반응이 없으면 채팅창으로 답을 보내 달라고 말해야겠다, 등등. 소통도 부족하고 말의 속도도 빠른 내 이 단점들을 보완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하고, 그 다짐을 기록하고 있는데 갑자기,



"집도 너무 머시고 오늘 수업도 하나밖에 없으시니 오늘 재택으로 수업하실래요?"

라는 달콤한 제안이 들어온다.


오잉? 나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기쁘게 그 제안을 얼른 받아 든다. 하마터면 출퇴근길에 또 다섯 시간을 쏟아부을 뻔했는데 정말 '몸 편한 제안'이로구나,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나는 가방을 풀고 내 책상을 세팅한다. 듀얼 모니터를 만들고 마우스를 시험 삼아 조작해 본다.


그, 그런데.. 이 불길한 느낌은... 뭐지?...

'몸 편한 제안'을 덥석 물고 보니,


이렇게 몸 편해지다 영~원히 편해지는 거 아니야?

일도 못하는 사람이 열심히 기를 쓰고 직장에 와서 수업할 생각은 안 하고

집에서 수업을 하고 싶어 한다고, 정신 상태가 제대로 안 박혔다고 오해하면 어쩌지?

(물론 내 정신 상태는 원래 정상이 아니지만서도..)


알고 보니 그 인기 많은 다른 강사님께서는, 줌zoom 조작이 불안하기도 하고 직장이 그리 멀지도 않으니 직장에 직접 나와서 수업을 하시겠다고 했단다. 나, 나.. 만 재택수업을 택한 것이다.


아, 달콤해도 문제다..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언제부터 이렇게 눈치를 보며 살았는지, 아니 원래 눈치코치만 보면서 쭉 살아왔던 건 아닌지.. 그런데도 일의 눈치는 좀체 늘지를 않고 나를 통째 바꾸어야 할 일들만 늘어난다.


그래도 별수 있나.

오늘은 오늘의 할 일이 있으니 그저 최선을 다하고 볼 일이다.



인기 없는 강사가 몸이라도 편해 보겠다는 게 뭐 어때서?

라고 움츠러드는 객기를 애써 펼쳐 보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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