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베르메르, Girl with a Pearl Earring, 1665
덴마크의 화가 빌헬름 함메르쇼이는 1898년부터 1909년까지 코펜하겐의 스트란가데 30번지 아파트에서 실내풍경을 그렸다. 회색을 사용한 단색 화면과 거의 드러나지 않는 붓터치를 통해 신비감이 감도는 실내 공간을 주로 다룬 작품은 '20세기의 베르메르'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베르메르의 따스한 빛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 몸을 휘감는다.
(왼) 빌헬름, Study in Sunlight, 1906, oil on panel, 54.5 X 46.5 cm, Private collection
(오른쪽) 요하네스 베르메르, Girl with a Pearl Earring, 1665
흔히 평론가들은 함메르쇼이의 그림을 두고 고요하다, 명상적이다, 북유럽의 우아함이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창가로 스며드는 빛이 섬세하고 시적이다라고도 한다. 이러한 찬사들이 사실 불편하다. 고급 레스토랑이나 호텔 로비에 걸린 함메르쇼이의 그림을 상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분위기를 망칠 것만 같았다. 그의 그림에는 장식적 우아함이 아니라, 형언하기 어려운 냉기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함메르쇼이는 예민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성격으로, 집이란 공간이 그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그림 속 집은 안식처가 아니라 오히려 격리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먼지가 햇살을 타고 떠다니는 듯한 텅 빈 방,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어둠, 등을 돌린 채 무엇인가를 응시하는 여인의 뒷모습. 이 모든 요소들이 결합되면 사색이 아니라 불안이, 고요함이 아니라 정적 속의 긴장감이 피어오른다.
특히 함메르쇼이가 즐겨 그린 반쯤 열린 문의 이미지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이 구도는, 평론가들이 말하는 '시적인 여운'과는 거리가 멀다. 어중간한 개방은 무언가가 들어올 수도, 문과 문사이의 냉기가 흐른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연출한 긴장감의 프레임에 가깝다. 또한, 나무로 된 가구 덩어리들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방 안을 더욱 음침하게 만든다. 왜 으스스한지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것들은 분명 생기를 빨아들이는 존재감을 가지고 있다.
모든 집순이, 집돌이들이 창문만 보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집 안에서도 분주하다. 책을 읽고, 운동을 하고, 영화를 보고, 취미생활을 즐긴다. 그들이 창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창보다는 창밖의 세상을 보며 사색하기 위함일 수 있다. 함메르쇼이 그림처럼 창만 바라보지 않는다. 세상과 단절된 채 벽만 바라보는 것은 사색이 아니라 이유가 필요 없는 무념무상일 것이다.
뒤늦게 국제 미술계에서 재조명받으며 이제는 억대의 가격에 거래되는 함메르쇼이의 작품들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의 그림이 주는 진정한 의미는 우아함이나 명상적 아름다움이 아니라, 냉정함, 불안이라는 실존적 공포를 너무도 정직하게 드러낸다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