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라이먼

by 봄플

로버트 라이먼(Robert Ryman, 1930년 5월 30일~2019년 2월 8일)은 정사각형 캔버스에 흰색의 가능성을 집요하게 탐구한 미국 미니멀리즘의 대표 작가다. 그는 “그림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특정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분위기가 필요하다”며 “그림은 스스로 드러날 수 있는 상황 속에 있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Robert Ryman, Untitled, 1965.jpg Robert Ryman, Untitled, 1965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백의민족’이라 불릴 만큼 흰색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달항아리는 단아함과 우아함을 상징하며, 크기와 형태, 그리고 그것이 놓이는 위치에 따라 집안의 품격과 여유를 드러낸다. 흰 벽지 위에 은은히 스며들 듯 자리한 달항아리는 고요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조화를 이루며 공간을 완성한다.


라이먼의 작품을 마주할 때, 나는 그 안에서 우리 고유의 미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흰색이라는 공통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달항아리가 공간과 조화를 이루듯 라이먼의 작품 또한 전시 환경과 유기적으로 호흡한다. 그가 말한 “그림은 스스로 드러날 수 있는 상황에 있어야 한다”는 말은, 달항아리가 놓인 공간의 품격과 분위기에 의해 제 빛을 발하는 한국적 미감과 깊이 닮아 있다.


Robert Ryman, Large-Small, Thick-Thin 2, 2008, Oil on stretched cotton canvas.png Robert Ryman, Large-Small, Thick-Thin 2, 2008, Oil on stretched cotton canvas


라이먼의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반 고흐의 대표적 화풍으로 알려진 임파스토(impasto) 기법이다. 목재나 천으로 된 캔버스 표면 위에 물감을 붓이나 나이프로 떠 올려 마치 한 겹 한 겹 얹어 붙이듯 쌓아 올리면, 두껍게 형성된 물감층이 요철과 붓자국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렇게 만들어진 표면은 관람객이 서 있는 위치와 조명의 방향에 따라 아크릴과 유화(oil) 물감을 스치는 빛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시각적 효과 또한 미묘하게 변화한다. 같은 작품이라도 한 걸음 옆으로 이동하면, 빛의 각도 차이에 의해 전혀 다른 느낌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라이먼의 그림에는 설명적인 요소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는 “그림의 문제는 무엇을 그릴지가 아니라 어떻게 그릴지다”라고 말했으며, “흰색은 주제가 아니다. 흰색은 붓질, 두께, 가장자리, 빛과 같은 다른 요소들을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일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설명하지 않는 그림은 차갑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바로 그 덕분에 관람객의 상상력은 한층 더 확장된다. 화면 속에 흩날리는 흰 점들은 한겨울의 눈송이로도 보이고, 어느 순간에는 꽃잎으로도 인식된다. 다소 거칠게 일어난 표면은 실내 인테리어에서 노출 콘크리트나 미장 벽을 떠올리게 하는 질감을 품고 있다. 라이먼은 어떤 사물도 정확하게 재현하지 않는다. 그저 관람자가 그렇게 느낄 뿐이다.


Robert Ryman, Untitled, 1963-1964.png Robert Ryman, Untitled, 1963-1964


그의 작품은 어떤 이에게는 눈보라처럼 보이고, 어떤 이에게는 꽃잎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미장 벽을 떠올리고, 또 다른 이는 달항아리의 정갈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라이먼은 결코 하나의 답을 제시하지 않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답을 자유롭게 찾아갈 수 있다.


그의 흰 정사각형 캔버스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빛과 그림자, 거칠음과 부드러움, 물감의 두께와 붓질의 흔적이 관람자의 위치와 시선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결국 라이먼의 작품은 그 자체로 완성된 작품이라기보다, 관람자의 경험 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예술이다.


Robert Ryman,1930.png Robert Ryman, Mission,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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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플레이리스트 바로가기 (유튜브, 매주 화목토 오후 9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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