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과 나의 모습

나_시선과 질문 2

by 봄플

역할과 나의 모습


INTRO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눅눅한 공기에 눌린 흔적들이 서서히 드러난다. 흐린 날씨와 흐려진 마음이 겹쳐질 때면, 사소한 장면 앞에서 뜻밖의 질문이 고개를 든다. 지금 이 길은 정말 원해서 걷고 있는 걸까. 지하철 창문에 비친 얼굴은 오늘도 ‘박사 과정생’이라는 이름으로 어딘가를 향하지만, 안쪽에서 느껴지는 맥락은 점점 멀어지는 듯하다.


흐려진 마음과 의문

처음부터 박사를 꿈꿨던 건 아니다. 디자인 산업에서 더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느낀 어느 시점, 방향을 틀었다. 예술, 기술, 정책이라는 언어가 뒤섞인 세계라면 질문 역시 정당성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박사라는 타이틀이 주는 신뢰를 계산하지 않은 건 아니었고, 생존을 위한 구조로 제도를 택한 것도 분명했다. 도전이라 불렸지만, 지속에 가까웠다. 기존 방식으로는 더는 버틸 수 없었기에, 선택이라기보단 필연에 가까운 전환이었다.

붙잡고 싶었던 질문을 따라 매년 주제를 제출했다. 기술 규제, 예술 융합, 메타버스 정책, 기술 특례. 시대를 겨냥했지만 돌아온 답은 매번 같았다. 예술 중심이라 불충분하다고 했고, 데이터가 없다고 했으며, 이직 경험은 연속성이 흐트러트리고 만다라고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지나온 시간은 쉽게 무시됐다. 논문을 쓰지 않은 게 아니라, 기준 안에서만 적절한 주제를 기다리는 시간이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연구는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일이지만, 안쪽에서 질문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결과를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사유하고자 하는 의지가 먼저였고, 오래 품어온 글쓰려는 욕망들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정해진 틀에 머물기보다, 스스로의 리듬을 따라갔다. 내안에서 자연스레 나온 건 논문이 아닌 문장이었고, 증명보다 여운, 설명보다 손에 남는 느낌이었다. 더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증명이 아닌 문장을 택했다. 여운이 남는 문장을. 더는 머뭇거리지 않아야겠다. 방향은 결정되었다.


문장의 증명

박사라는 타이틀로 설명되는 삶에 익숙했지만, 전체 방향을 에세이로 전환하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사회가 요구하는 결과물 대신, 사유와 내면을 담은 언어로 자신을 설명하고 싶은 갈망이 자라났다.

외적 성취로써의 논문보다, 삶에서 생각을 기록할 수 있는 글쓰기를 택했다. 역할로 정의된 틀에서 벗어나, 사유를 지속할 수 있는 방식으로서 글쓰기를 선택했고, 그 안에 살기로 했다.

타이틀이나 결과물에 묶이지 않기로 했다. 맡은 역할은 감당하면서도, 지나온 내용을 언어로 되새기려는 시도였다.

역할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여전히 기획서를 작성하고, 타당성을 입증하며, 기대에 응답하는 하루를 산다. 내부가 무뎌지지 않도록 틈을 만든다. 짧은 문장이라도 적는다. 설명이 아니라 기억을 붙잡기 위한 문장들. 논문이 담지 못했던 사유, 요청받지 않았던 정서, 효율과 무관한 질문들.

어느 날은 스스로가 지나치게 조용해졌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감정을 자극적으로 드러내기보다 미세하게 눌러두는 방식에 익숙해졌고, 시선을 직접 마주하기보다 한 발 물러서서 흐름을 조정하는 감각에 더 익숙해졌다. 말이 줄어든 자리에 글이 쌓였고, 그 글 속에서 생각은 이전보다 더 오래 머물렀다. 표현하지 않아도 꺼지지 않고, 써내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는 결들은 조금씩 쌓이며 터전을 만들었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스스로와 마주할 수 있는 장소 하나가 형성되었다.


역할과 존재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문득 스칠 때도 있었고, 선택이 잘못된 방향이었다며 조용히 자책한 적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걸어온 길은 쉽게 밀어낼 수 없는 일부로 남았고, 완벽한 선택이란 없었다는 사실 앞에서 결국 가능한 쪽을 조심스럽게 택할 수밖에 없었다. 피할 수 없는 길 위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만은 남겨두었다.

사회는 끊임없이 역할을 요구한다. 무엇이 되었는지보다, 어떤 방향을 통과했는지를 묻고 싶다. 삶은 가늠할 수 없고, 기대는 멈추지 않는다. 모든 것에 반응하지 않아도 충분하다.


질문은 끝나지 않았고,

이 시리즈는 앞으로도 이어집니다.

다음 편에서 만나요.



2025.05 작성

쉬어도 괜찮습니다.

그 안에서 조금씩,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이 글이 그 길 위에 놓인 조용한 쉼표 하나가 되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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