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열, 고요

나_흔들릴 때마다 돌아보는1

by 봄플

과열

멈추고 싶었다. 할 일은 계속 쌓여만 갔고, 이유는 점점 흐려졌지만, 멈출 수 없었다. 바쁘다는 말만 반복하며,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 아래, 뒤엉킨 내면을 방치했다. 마음은 과열된 기계처럼, 멈추면 안 된다는 강박 속에서 피로와 불안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앞의 풍경조차 뚜렷하지 않았고, 익숙하던 것들은 무채색 배경처럼 스쳐갔다. 기쁨도, 재미도, 자극도 감지되지 않았고, 여유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감각이 사라진 상태를 잠시 평온이라 착각했다.

무작정 걸었다. 어디를 향하든 중요하지 않았다. 뚜렷한 답을 구하려는 마음보다, 쌓인 감정을 풀고 정리하고 비워내는 일이 먼저였다. 풍경도 공기도 무심했으며, 시간은 의미 없이 흘러갔다. 무의미함이 오히려 해방처럼 느껴졌다.

마음은 억눌리지도, 정돈되지도 않았다. 다만 과열된 상태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자, 조금은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었다. 풀리지 않는 마음을 엉킨 실타래라 여기며, 실 한 가닥을 풀어내어 바라보고, 의미를 붙여보았다.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이해보다 수용이 먼저였다.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상태.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더는 설명하고 싶지도 않은 평온. 아주 작은 감각이었지만, 방향을 바꾸기엔 충분했다.


고요

고요는 결국 선택이었다. 어떤 감정에도 끌려가지 않고, 어떤 상황에도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 풍경이 고요를 주는 것이 아니라, 풍경 앞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고 내려놓을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순간이 곧 고요였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선택, 스스로에게 되돌아오는 단 하나의 방향.

반복되는 루틴과 피로 속에서도, 틈은 있다. 모든 것 사이에도 틈은 존재하고, 그 사이에서도 고요는 스며든다. 틈을 알아차린다면,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어느 날, 평소보다 이르게 귀가한 오후였다. 문을 닫고 들어선 집 안의 공기는 그대로 숨 쉬고 있었다. 할 일을 미루고 침대에 눕자, 전등은 켜지지 않았고, 방 안을 스치는 빛은 낮은 각도로 누워 있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은 벽 한쪽에 비스듬히 번졌고, 아무 소리도 없었으며,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눈을 감자 느슨한 졸음이 스며들었고, 예상보다 깊은 잠에 빠졌다. 아주 짧은 낮잠이었다. 눈을 떴을 때, 어지럽던 마음이 어느 정도 정돈되어 있었다. 느슨한 햇살과 짧은 잠으로 삶은 낯선 각도로 비쳤다.

고요는 오랜 균열이 멈춘 뒤, 겨우 손끝에 닿게 될 수도 있다. 외부의 자극이 멎고, 마음이 가라앉으며, 더는 말이 필요 없는 상태. 장기간의 파동 끝에서 고요를 찾고자 한다면, 애써 뭔가를 하려 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 기다리는 일, 멈춰 있는 일. 어쩌면 안에서 아주 작고도 분명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을지 모른다. 불안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불안에 붙잡히지 않는 법을 익히는 것.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매번 새롭게 중심을 찾아가는 연습. 그 연습 안에만 고요는 머문다.

복잡함이 좀처럼 멈추지 않는 날들 속에서도, 잠시 멈춰 햇살이 머무는 자리를 바라볼 수 있다면,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모양으로. 잠시 숨을 고르고 싶은 마음 하나 간직한다면, 어쩌면 그게 시작일지도 모른다.


질문은 끝나지 않았고,

이 시리즈는 앞으로도 이어집니다.

다음 편에서 만나요.


2025.05 작성

쉬어도 괜찮습니다.

그 안에서 조금씩,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이 글이 그 길 위에 놓인 조용한 쉼표 하나가 되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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