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비혼모임을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잘살아오는 동안, 이 사회에서 안전한 둘레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준 비혼여성공동체 '비비'가 있었다. 나는 비비의 한 개인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는 쌓아온 신뢰를 안고 어떻게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고 있는지,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조화롭게 지속할 수 있는지, 지난 20여 년간의 비혼생활과 공동체적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비혼, 공부, 여행, 독립, 공간, 소설, 돌봄, 공동체, 글쓰기 등 주제를 잡아 한 주제당 3~4편 글을 쓸 계획이다.]
비비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다른 곳에 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 다른 곳이 어디일지 궁금하지 않다.
소설을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다른 ‘나’가 되었을 거다.
그 다른 ‘나’가 어떤 ‘나’로 존재했을지 아득하다.
비비와 소설이 없었더라면 나의 인생 2막은 펼쳐지지 않았겠지.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소설 1] #. 반려가 아니고서야,
나는 부동자세로 있다. 움직임이 있다면 코로 들어가고 나가는 숨결, 떨리는 눈꺼풀, 흔들리는 동공, 귓바퀴의 간질거림, 망설이는 입술, 손끝과 발끝의 경직 정도.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있기는 있지. 가만히. 내가 없는 것은 아니니까. 부재의 순간이 왔을 때 더 명확해지려나. 이것으로 나의 ‘행위’를 증명할 수 있을까. 나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느끼고 싶었다. 그래서 뇌는 계속 움직였다. 몸 밖에서는 눈으로 보이는 세계, 거기에 ‘활자’가 있길 바랐다. ‘난 읽고 있어!’라고 말하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허구의 세계일지라도. 할 ‘일’을 찾지 못했던 나날이었다.
‘내가 인생에서 처음으로 맞닥뜨린 어려운 문제는 아름다움에 대해서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금각사』의 미조구치는 불완전한 자신과 절대미의 상징인 금각을 동일시한다. 나는 늘 생각했다. 대학에 가고, 일을 구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타인을 만날 때 몸 밖으로 나오는 말은 내가 생각한 그대로가 아니었다. 말은 즉각적이고, 순간적이고, 타이밍이 중요했다. 시간은 나중에 흘렀다. 나는 혼자가 되었을 때 그때 하지 못한 말을 글로 내뱉었다. 나의 행위는 가장 마지막에 가까스로 실재했다. 그래서 노상 박자가 맞지 않았다.
‘내가 애써서 바깥 세계에 도달해 보면 언제나 거기에는 순식간에 빛이 바래고 어긋나 버린, 그리하여 그것만이 내게 걸맞은 듯한 낡은 현실, 즉 절반쯤 상한 냄새가 풍기는 현실이 놓여 있을 뿐이다.’
소설은 내가 허덕이는 바깥 세계를 그대로 보여줬다. 나는 말더듬이 미조구치가 되어 소설로 들어간다. 거기에서 바깥 세계와의 시간차 없이 움직였다. 현실로 돌아오면 소설의 메타포만 남아서 내 생을 끌고 갔다.
나는 아름다운 것과 그러지 아니한 것을 구분했다. 결혼은 그러지 아니한 것에 속했다. 결혼이 조금만 아름다웠더라면, 나는 결혼했을까. 나는 최종심급에 ‘아름다움’을 올려놓았다. 결혼이 자유를 앗아가는 순간 그나마 남은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나는 의지가 강한 사람은 아니지만, 박탈을 못 견뎌 했다. 나를 설명하는 말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바깥 세계에서 나는 겨우 결혼하지 않을 자유, 그리고 ‘비비’를 선택했다. 소설 덕분이다.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 황정은은 물었다. 나는 대답은커녕 그가 구현한 폭력의 세계에서 허우적댔다. 원치 않았다. 나는 아름다운 것을 좇고 있었다. 수면에 부서지는 햇빛 같은 것을 바라보며. 집회 현장에는 가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대가 앨리시어 덕분에 불쾌하고 지루하더라도 앨리시어는 계속할 것이다.’
나는 괴로웠다. ‘추하고 더럽고 역겨워서 밀어낼수록 신나게 유쾌하게 존나게 들러붙는’ 현실을 나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소설과 현실이 뒤엉켰다.
‘그대는 어디에 있나, 이제 그대의 차례가 되었다. 이것을 기록할 단 한 사람인 그대,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그가 다시 묻는다. 소설은 끝이 났고, 나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 맞닥뜨렸다.
‘야. 앨리시어는 그의 동생을 야, 라고 부른다. 그대에게 그 이름을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다. 여태 노력했으나 그 이름 여태 말할 수 없다. 차라리 이것이다. 앨리시어의 실패와 패배의 기록이다.’
나는 실패하고 싶지 않다. 비혼의 삶에 ‘비비’라는 이름을 붙이고, 공동체적 삶이 패배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나는 어느 날 비비와 함께 집회의 끄트머리에 서 있다. 이글이글 불타는 하늘 아래 미친년처럼 휘날리는 깃발은 아름다웠다.
내 생에 잘한 것 한 가지는 내가 좋아하는 한 가지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만 알 수 있고, 나만 할 수 있는 일. 우리는 많은 것을 나누지만, 각자 다른 몸이니까. 비혼 정체성으로, 비비의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공동체적 삶을 잘 나아가기 위해 중요한 것은 언제나 ‘나 자신’. 매 순간 흔들리는 자아, 타인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자아,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자아 곁에 나는 오래 머물지 못했다. 나의 일상에는 언제나 그 자리에 소설이 있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행위는 무엇일까. 오로지 자신과 시간과 공간만이 주어졌다. ‘쾌快’의 감각이 느껴지는 순간, ‘락樂’의 감정이 차오르는 순간, 나는 잠시 읽던 소설을 덮고 눈을 감는다. 그가 알까? 아니, 몰라도 된다. 이건 내가 느끼는 것이니까. 소설은 책이 되고부터, 문장을 읽는 나의 것이지 문장을 쓴 그의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 제발 그에게 물어보지 않기를.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답이 없는, 규정에 얽매이지 않는,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은, 그래서 표현 의지로 가득한, 오로지 부정형으로 실현된 세계. 그리고 독자에게 부여된 해석할 권리. 나는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삶과 다르지 않다고 쓴다. 그래서 소설과 나 사이에 어떤 레이어도 끼어들지 않은, 나만 교감하고 싶은 사치邪侈심이 발동한다. 쾌락이 아니고서야, 반려가 아니고서야, 이 아름다운 소설을 뭐라 말할 수 있을까.
늦봄 해가 떨어지기 일보 직전, 아카시아 향이 코를 찌르고, 벚꽃 떨어진 자리 솟아난 잎은 바람에 나풀거리고, 코스모스 닮은 금계국이 몽우리를 터트린다. 나를 지나쳐 가는 사람들의 대화가 귀를 간질인다. 나는 천변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