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비혼모임을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잘살아오는 동안, 이 사회에서 안전한 둘레가 되고 버팀목이 되어준 비혼여성공동체 '비비'가 있었다. 나는 비비의 한 개인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는 쌓아온 신뢰를 안고 어떻게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고 있는지, 개인과 공동체가 어떻게 조화롭게 지속할 수 있는지, 지난 20여 년간의 비혼생활과 공동체적 삶을 돌아보고자 한다. 비혼, 공부, 여행, 독립, 공간, 소설, 돌봄, 공동체, 글쓰기 등 주제를 잡아 한 주제당 3~4편 글을 쓸 계획이다.]
[돌봄 4] #. 큰 숨을 쉬고,
(조심스럽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저기, 일어났어? 컨디션은 괜찮아?”
“네. 방금 약 먹으려고 일어났어요. 괜찮아요.”
“다행이네. 나, 부탁 좀 하려고. 엄마 병원 10시까지 가야 하는데, 택시가 안 잡히네.”
“네. 지금 옷만 입고 바로 나갈게요. 우리 동 앞으로 와요.”
(목소리 톤이 올라가며) “오케이! 땡큐!”
2022년 6월 15일 엄마는 회전근개 파열로 인해 오른쪽 어깨를 수술했다. 2주 입원하고, 한방병원으로 옮긴 후 외래진료를 받으러 가던 참이었다. 엄마의 보호자가 된 나는 차가 없다. 오늘 출근은 좀 늦을 것 같다. 오늘은 주간 회의도 해야 하는데. 나는 추억이 된 슬픔 하나를 꺼낸다.
2021년 11월 28일 일요일 오전 10시, 아버지를 태운 119가 대학병원 응급실 앞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검정 봉투를 입가에 대고 엉거주춤 누워있었고, 엄마는 더 병약한 모습으로 119에서 내렸다. ‘보호자는 한 명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는 보호자가 되었고, 엄마는 밖에서 오빠를 기다렸다. 환자와 보호자는 코로나 검사 시행에 동의한다는 사인을 하고 나서야 응급실로 향했다. 119는 계속 도착했고, 담당자는 같은 설명을 반복했다.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 씩씩한 톤으로 대답했지만, 코로나 검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1차 초진하고 아버지가 누워있는 베드는 신속하게 옮겨졌다. ‘보호자는 간호사가 있는 응급실 쪽으로 가세요.’ 건네받은 보호자 명찰을 훈장처럼 목에 걸었다. 먼저 간호사를 찾고, 이어서 아버지를 찾았다. 아, 여기가 응급실이구나, 실감이 났다. 나는 여러 번 말했다. 아버지는 2019년 1월 파킨슨 진단을 받았고, 오늘 아침에 엄마가 깨워서 일어나려다가 순간 어지럽고 힘이 빠져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했다. 계속 토할 것처럼 메슥거리고 어지러움을 느끼며, 온몸을 떨고 있다. 간호사는 혈압이 내려가지 않는다며 링거를 달았다. CT와 엑스레이를 찍고, MRI를 찍을 건지에 관한 여부를 물었다. 찍겠다는 답을 하고, 그다음부터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주삿바늘이 꽂혀있는 아버지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다. 나는 아버지 손을 부여잡는다.
“네가 잡으니 좀 낫다.”
뭐가 좀 나아졌을까. 아버지의 떨림이었을까, 나의 두려움이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좀 나아졌다. 문득 아버지는 엄마와 오빠들과 동생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마음의 정체를 알 수 없이 슬퍼졌다. 그나마 챙겨온 생수를 한 모금 마셨다. 한 시간 MRI를 찍고 응급실로 돌아왔다. 주위에는 온통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MRI 촬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비급여로 적지 않은 금액을 내야 하기에 지급이 가능한 경우에만. 하지만 누구든 결국에는 MRI를 찍어 뇌졸중 발병 유무를 확인해야 할 터이다. 아이는 어리고 남편은 올 수 없는 상황이라 보호자 없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흐느끼던 젊은 여자도, 무색한 얼굴의 사위 옆에서 그거 찍는다고 낫는 것도 아닌데 그 비싼 것을 찍어야 하냐고 성내던 할머니도, 애타는 어머니의 손길을 받으며 아무렇지 않았는데 백신 맞고 갑자기 팔다리 힘이 빠졌다는 중년 남자도 매한가지다.
의사는 환자 몸을 움직여가며 묻는다. 어지러워요? 어지러워요? 어지러워요? 여긴 온통 어지러운 세상이다. 저 의사는 하루에 몇 번을 물었을까. 나도 아버지에게 묻는다. 어지러워요? 나는 질문을 바꾼다. 아까보다 좀 나아요? 혈압은 내려가고, 아버지는 일어나 앉아 응급실 풍경을 바라본다.
“여기는 혼자는 못 오겄다.”
“아까 들어올 때 아버지는 코로나 검사했어요?”
우리는 동문서답 대화를 나눈다. 환자는 무료, 보호자는 8만 원 경비를 내야 하는데, 사인은 했는데, 검사는 안 했는데,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혹시라도 양성이면 어떡하나, 어이없는 고민에 빠졌을 때 아버지의 음성 결과 문자가 도착했다. 119를 타고 왔을 때보다 나아진 아버지는 먹던 약을 조절해서 처방받고, 일주일 후 외래를 예약하고, 응급실을 나왔다. 오후 8시, 어둠 속에서 엄마와 오빠가 기다리고 있었다.
“너도 같이 갔다 갈래?”
더 작아진 엄마가 묻는다. 엄마의 가시지 않는 불안과 혼자 돌아갈 아들을 염려한 마음이 읽혔지만 망설이다가 대답한다.
“아녀요. 나는 집으로 갈게요.”
“그려그려. 너도 쉬어야지.”
큰 숨을 쉬고, 작은오빠와 동생에게 퇴원 소식을 알리고, 차는 나를 내 집에 내려주고 시골로 갔다. 고요한 집에 들어서는 순간 허기가 밀려왔다. 온종일 물 두 모금을 마셨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허둥지둥 먹을 것을 밀어 넣었다. 다음 날 아침,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엄마의 씩씩해진 목소리가 반갑다. 우리는 서로의 불안을 잠재우고, 어제의 응급실 후일담을 나눴다.
일주일 후, 담당 의사는 응급실 방문 상황을 듣고 PET CT 검사를 제시했다. 검사실에서 나온 아버지에게 힘들지 않은지 물었다.
“아고, 저번에 그때처럼만 아니면 살겄다.”
일주일 후, 검사 결과를 보고 담당 의사는 비전형 파킨슨 진행을 설명했다. 파킨슨 약을 바꿔 처방하고, 한 달 후 만나기로 했다. 다시 한 달 간격 병원 일정을 회복했다. 나는 나의 일상을 회복한 듯 큰 숨을 쉬었다.
나는 엄마의 잇따른 무릎, 어깨 수술 시 간병하고, 한 달에 한 번 아버지 병원 동행을 하고 있다. 오늘은 엄마와의 동행이다. 동행이 잦아지고 있다.
“에고, 이렇게 친구까정 폐를 끼쳐서 어쩐대요.”
“아니에요. 저도 언니들 도움 많이 받아요.”
엄마는 반짝별의 차를 타며 멋쩍어하고, 나는 그저 웃는다. 진료를 마치고 택시를 잡고 주얼에게 카톡을 보낸다. 나, 삼계탕 2인분 집으로 시켜주면 좋겠네. 오후 2시, 엄마는 한방병원으로 돌아가고, 나는 공간비비로 늦은 출근을 했다. 가자마자 나보다 젊은 주얼에게 내 휴대폰에 ‘배달의민족’ 앱 까는 것을 배운다. 이건 무슨 돌봄의 연결고리인가 싶다. 나 혼자서 가능한 일이 없다.
큰 숨을 쉬고, 주간 회의를 시작했다. 일주일 공간비비 일정, 잦아지는 상근자의 부모님 병원 동행 일정을 확인한다. 나는 천천히 늙어가고 싶었다. 그건 바람일 뿐, 나의 나이 듦과 부모의 노화, 그건 동시에 발맞춰 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푸른산은 지금 부모돌봄의 최전선에 있다. 당사자만 알 수 있는 것, 당사자만 말할 수 있는 것, 당사자만 공감할 수 있는 것, 그녀가 ‘비혼여성 부모돌봄 자조모임’의 주축 구성원이 된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참여자들에게는 부모돌봄 경험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각자의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위로가 되는 시간이 되고 있다.
돌볼 가족을 꾸리지 않은 비혼여성에게 당연하게 부과된 부모돌봄,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에서의 윤리적 딜레마.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하려고 노력합니다, 기준점을 정해보지만 ‘할 수 있는 선’은 매번 갱신되고 있다. 나의 일상을 회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 또한 매번 길어지고 있다. 나는 점점 비혼여성 부모돌봄 당사자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나를 잘 지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