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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남 Feb 28. 2024

변태 전과 후  



“탄.”


익숙한 목소리가 뒤통수에 박혔다. 치였다. 난 좋지도 싫지도 않은, 다소 놀라운 감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을 걸어오다니! 그러니까 그것이 놀라웠다. 반가워해야 할지 경계해야 할지 빠른 판단이 서질 않았다.  


“넌…”

“치야.”

“그래 알아…. 아까 너의 연설 잘 들었어. 멋... 지던데?”

"고마워."


나는 생글생글 웃어댔다. 나와 반대입장을 가진 사람이 좋은 말을 해주러 올리가 없는데 뭐가 좋다고.  


"넌 어디 출신이야?"

“역시 날 기억 못 하는 군.”

“…?”

“하하. 우리 옛날에 자주 놀았잖아. 하긴 뭐. 내가 그땐 존재감이 없었지.”

“그... 그랬나?”


그의 얼굴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화를 내는 것 같은 묘한 기류가 흘렀다. 난 그 미묘하고도 매력적인 얼굴을 보자 기억을 빨리 찾아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생겼다. 최대한 빨리. 그를 기억해 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내 기억에 없다. 우리가 같이 놀았었다고? 내가 저렇게 매력적인 아이와 한 패거리였다면 내 인생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런 젠장. 난 전혀 그에 대한 기억이 없다. 서운해하려나? 망했다. 설마 나를 다른 이로 착각하는 건 아닐까.


어느새 나는 이 매력적인 아이에게 실망감을 줄까 봐 전전긍긍해하고 있었다.


“하. 하하. 그게 그때는 친구들이 너무 많아 이름도 모르고 지낼 때였.... 하하하.”

“난 네가 유일한 친구였는데.”


잠깐의 정적. 이건 더 청천벽력 같은 소린데. 난 빨리 기지를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하. 변태. 맞지? 하하하 ”


나는 중요한 것을 깨닫는 것 마냥 손가락을 튕기며 실없게 웃다가 여전히 굳어져 있는 치의 얼굴을 보고는 이내 정색했다. 우리들의 완전변태. 번데기에서 날파리가 되면 어떤 날파리는 정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훤칠해진다. 치도 아마 그 케이스가 아닐까. 남자도 반할 만큼 매력적인 얼굴을 번데기 때도 가졌다면 당연히 기억했을 거다!


“하하하하. 왜 이렇게 얼어 있어!”


당황해서 굳어버린 내 얼굴을 보고 그는 나의 어깨를 툭치며 웃었다. 나는 한 숨을 살살 내뱉으며  억지로 다시 웃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넌 많이 변했구나....”


변태 이전의 모습이 생각나질 않는데 변하고 말고를 어떻게 안담. 나도 모르게 내뱉는 말이 대화의 갈피를 못 잡게 만들고 있었다. 그의 표정과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움츠려 들게 했다. 기에 눌린 모습이 들키기 싫었는지 나는 또 어떤 말이든 꺼냈어야 했다. 이번엔 목소리에 힘을 주고.


“부엌엔 안 갈 거야? 나와 함께 하자.”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너와?”


응? 그는 정말 배를 잡고 웃었다. 웃기지 않았는데 웃는 건 비웃는 건가?


“넌 레몬을 먹어 보고 싶지 않아?”

“넌 번데기 때도 레몬 타령을 했었지. 하하. 탄. 넌 변한 게 없구나! 어른처럼 생각할 줄 알았는데 여전하네.”

“…어…른? 어떻게 생각해야… 어른… 인데?”

“탄. 난 부엌에 안 갈 거야. 일단 다른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겠어. 다음에 또 얘기하자. 토론 기대할게.”


난 얼떨떨해진 상태로 자리를 박차고 날아가는 치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저놈의 번데기 시절이 도대체  기억이 나질 않자 나는 발을 구르며 더듬이를 구겨댔다. 친해질 수도 있겠다 생각한 나의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그가 존경스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우리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포와 한이 치가 떠나자 날아왔다.


“치랑 무슨 얘기했어?”한이 다짜고짜 물었다. 성격 급한 놈.


“내가 쟤랑 아는 사이라는데?”

“하하하. 당연하지! 알잖아! 너! 같은 유치원 다녔잖아 초랑 셋이서. 자주 놀았던 것 기억 안 나?”

“초도 같이 놀았?”


헉…. 기억났다! 나와 치와 초는 셋이서 자주 놀았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 내가 한심했다. 맞다 그는 치였다. 내가 그를 기억하지 못했던 건 그가 아주 수동적인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해주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저런 아우라를 뿜을 수 있는 멋진 남자로 변하였을까.


“걔가 어떻게 저렇게 됐데? 말도 안 돼! 저럴 수 있어?”

"나도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앤 줄 알았는데 알고 봤더니..."

"그래, 뭐 아는 거 있으면 다 말해봐!"


내가 조급한 모습을 드러내자 한이 거드름을 피우며 두 손을 비볐다. 그는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 자가 있나 없나 확인이라도 하는 듯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고는 나와 포만 들릴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쟤 부모님이 바로 김 씨 아저씨의 형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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