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니 핵주먹

by 봄남





“재윤아! 재윤아!”


눈을 뜨고 일어나 보니 여긴 내 방. 엄마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재윤아! 어서 일어나서 밥 먹어.”


나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아침 시간. 병원도 아니고 천국도 아니고 내 방이라고?

“아이고. 재윤아! 밥 먹으라니까!!”

엄마의 목소리는 한 층 더 커졌다.

‘뭐지…? 나 밴에 치인 거 아니야?’

고개를 들어 몸에 잘 붙어 있는 두 손과 두 발을 확인했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하다고? 방금까진… 저녁이었는데! 그냥 잠깐 정신 잃었다가 지금 일어난 건가? 맞다 그 빨간 모자! 그 빨간 모자 여자애는 어떻게 된 거지. 난 왜 그 여자와 함께 뛰었을까.


꿈이었는지 생각해 봐도 이상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던 기억이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봤는데 6월 27일이다. 응? 6월 27일? 기말고사 전? 기말고사는 7월인데. 어제는 분명 7월 1일이었는데! 핸드폰이 먹통일 수도 있으니 껐다가 다시 켜보았다. 여전히 6월 27일.

“엄마! 오늘 며칠이야!”

다급하게 외치는 내 목소리에 엄마는 더 신경질을 냈다.

“며칠은 며칠이야 27일이지! 빨리 나와서 밥이나 먹으라니까! 너 늦었어!”

나는 거실로 뛰쳐나오며 말했다.

“엄마, 나 어제 집에 어떻게 왔어?”

“자전거 타고 왔겠지. 뭔 질문이 그래?”

“나 실려 오거나 하지 않았어? 누가 들쳐 업고 오거나 하지 않았어? 어젯밤에?”

“아침부터 무슨 헛소리니. 너 어제 학교 조퇴 하고 바로 집에 왔잖아 배 아프다고.”

“어? 낮에?”

“2시에 왔잖아! 벌써 이런 걸 잊어 먹고살면 어떡하려고 얘가 이래? 빨리 정신 차리고 밥이나 먹어.”



나는 엄마가 차려준 아침 밥상을 허겁지겁 먹고 집을 나섰다. 어젯밤 차에 부딪힌 것 같은 느낌이 났지만 몸 컨디션은 매우 좋았다. 정말 그게 꿈이었을까!

마음은 어리둥절한데 몸은 기계처럼 학교로 향했다. 마을버스를 탈 때에도, 학교에 도착해서도, 모든 달력은 오늘이 6월 27일인걸 말해 주었다. 내 핸드폰이 고장 난 게 아니라 내가 고장 난 것 같다.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교실 풍경 속으로 들어가 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얼떨떨했다. 아무 생각 없이 승학이 자리에 걸려 있는 내 나이키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진이가 몸을 건들거리면서 내 옆자리로 왔다.



“야 저거 네 가방 아니야? 왜 저 새끼가 너껄 가지고 있어? 뺏겼냐?”

“아, 빌려간 거야. 중요한 자리에 간다고 나한테 잠깐 빌려달라고 했어. 저번에 말했….”

“미친. 웃기고 있네. 너 뺏긴 거야.”

“아니…. 아니까?”

앗. 이건 뭐지? 도진이가 했던 말을 한다. 그리고 내가 보고 있는 도진이의 이 모습도 똑같다. 그리고 27일이면 내가 승학이에게 가방 달라고 한 날이 맞다.

“어히구. 순진도 하셔라. 언제 빌려줬는데?”

“자. 자자자자잠깐. 잠깐만.”

“왜? 왜 이래?”


그렇다면 정말 오늘이 6월 27일이고 나는 이 날을 두 번째 살아 내는 거라고? 그 유명한 회기인가? 아니면 타임 루프를 경험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정신병 같은 것에 걸리기라도 한 것일까.


“맞네. 뺏긴 거. 일진한테 당했네.”

혼란스러웠지만 나도 모르게 입꼬리는 올라가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이상했다. 꿈을 꾸는 것일지도 몰라 도진이의 손을 잡고 내 뺨을 때려 보았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뭐야 이 새끼? 실성했어?”

“잠깐. 나 바람 좀 쐬고 올게.”

“어디가? 같이 가!”

“따라오지 마 씹새야. 똥 싸러 갈 거야.”

나는 오른쪽 발을 들어 아무렇게나 휘둘거리며 도진이를 밀어냈다.


조금 후면 1교시가 시작되지만 난 정리가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엄마가 아침에 차려준 밥상 메뉴도 똑같다. 된장찌개, 계란 프라이, 김치. 교실 안의 아이들의 노는 위치, 담임 선생님의 옷차림, 날씨, 도진이가 나에게 와서 앉는 장면까지 모든 것이 그날과 같다. 내가 정말 다시 돌아온 거라고? 게다가 나의 몸과 정신은 멀쩡하다는 점!


교실로 다시 돌아가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승학이에게 가방을 달라고 말해보면 된다.


난 도진을 지나치며 재빨리 속삭였다.

“야. 딱 기다려. 가방 가져올게.”

“뭐… 뭐?”

내가 생각해도 잘생긴 표정을 지어 보이며 도진이를 응시했다. 그런 나를 보는 도진이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토가 나올 것 같다. 내가 승학이와 가까워지자 그의 표정은 다소 두렵게 변했다.


“야, 야, 아서라 아서.”

그가 내 팔을 잡으며 저지했지만 나는 그의 손을 털어냈다. 남자가 봐도 좀 멋있었을 듯.


“최승학.”


나를 말리던 도진이가 엉거주춤 의자에 앉았다. 승학은 분명 나의 목소리를 듣고도 앞에 앉은 친구와 장난질하는 척을 했다. 그때와 같다.

“최! 승! 학!”

그는 여전히 웃으며 나를 향해 돌아보았다. 그리고 나의 어깨를 털썩 잡았다. 술에 취한 아저씨처럼 건들건들한 몸도 여전하다.

“오오오, 재윤이 우리 재윤이. 무슨 일이래?”

똑같은 대사.

“내 가방 언제 줄 거냐.”

“어? 가방? 가바아 앙. 아아아. 왜?”

“네가 빌려갔잖아. 이제 나한테 줘야지.”

“급해?”


맞다. 저 자신감 있지만 비열한 표정. 기억한다. 나는 그날을 다시 사는 것이다. 갑자기 모든 것이 재미있어졌다. 어쩌면 신이 내게 준 선물일까!


“어 야, 졸라 급해. 당장 내놔.”

나의 당당한 목소리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황한 거 맞지? 그는 나의 어깨를 주무르다가 비듬이라도 털어내듯 내 어깨를 살살 털어냈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

“내가 다른 데이트가 또 생겼는데 말이야. 이틀만 더 빌려줘.”

“야 빌려간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갖다 줘! 갖고 싶으면 너도 그냥 하나 사아아!”


나는 일부러 여자애들 쪽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애들, 그러니까 말이 많을뿐더러 루머를 뿌리기 좋아하는 여자애들이 우릴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 더럽고 치사한 놈. 좀 빌리즈느끄.”

그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도진이는 마음이 쫄렸는지 승학이 뒤에서 두 손으로 엑스표를 만들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만하라는 소린가? 난 이제 더 이상 찌질할 필요가 … 없는데. 막말로 덩치도 내가 더 크다.

“됐고. 당장 내놔. 내 가방.”

나는 그의 이마에 내 이마를 갖다 댈 만큼 가까이 간 다음 눈을 부라렸다.

“하…. 씨발. 웬 잡것이….”승학은 역시 밀리지 않았다.

“당장 안 내놓으면 5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넌 상상도 못 할 것이다.”나는 한 번 도 누굴 때려본 적 없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승학이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노려 보았다. 노려보는 저 차가운 눈빛. 얼마든지 잔인할 수 있을 것 같은 저 눈빛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다. 갑자기 면도칼이라도 꺼내면 어떡하지. 그러면 오늘을 다시 살면 될 일이다. 하지만 오늘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난 평생 얘한테 괴롭힘을 당하며 살아야 되는 걸까. 망했다고 생각하는 와중에도 눈의 힘은 풀지 않았다.

오만가지 생각이 스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더니 내 귀에 대고 말했다.

“븅신아. 알았어. 처 가져가.”


그렇게 나는 가방을 되찾았다. 깡이었구나. 필요했던 건.

도진이는 매우 흥분했다.


“와 방금 씨발 뭐였어? 지금 일진이랑 싸울 뻔한 거야? 네가 일진한테 덤빈 거야? 그래서 일진을 이긴 거야? 와 씨발 쫄려서 죽는 줄 알았네!”

“당당하게 살자 도진아. 사람답게 살자 도진아.”

“응. 그래야지! 자기 물건은 자기가 챙겨야지. 응.”


수군거리는 반 아이들의 모습을 뒤로하고 나는 도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는 의기양양해졌다. 폭력은 없었다. 교묘한 기싸움이 있었을 뿐.

그 사건 직후로 나는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학교를 째고 PC방에 가는 것을 굉장한 상금처럼 여겼다. 승학이 기를 눌러주고 나니 나는 누구든 다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태, 준호, 성진 세 명의 친구들이 어느 순간부터 나랑 도진이와 함께 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은근히 무리를 이루며 걸어 다녔다. 우리는 가는 길거리마다 아무 이유 없이 큰소리로 소리 질렀다. 사람들의 이목을 즐기며 의기양양했다. 늘 덩치값 못한다고 구박만 하던 엄마의 잔소리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아! 맞다 엄마. 울상 짓던 엄마의 모습이 생각났다.

이제, 그때 밤늦게 들어간 집.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아직 불이 켜져 있고 엄마 아빠는 싸우는 중이셨던 그 집을 이제 곧 들어가야 한다. 나는 그때를 기억해 보았다. 엄마 아빠가 밤새 싸우시고 또…. 전 재산을 들여 산 주식을 엄마 등살에 급하게 팔아버렸는데 몇 시간이 채 되지 않아서 3배가 뛰어서 엄마가 거의 실성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띠. 띠. 띠띠띠띠띠띠띠.


현관무을 열고 들어서니 아니나 다를까 분위기는 험악했다. 신발도 채 벗지 않았는데 대차게 찌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게 왜 그 돈을 다 집어넣었어! 왜 몽땅 다 왜!”

엄마는 울 지경, 아빠는 넋을 놓고 있는 저 풍경. 정확히 일치한다. 그들의 절망을 보고 안심했다. 정말 그날이어서.

“왜! 왜! 그 사람 말을 들어!! 그 돈 그럼 다 못 찾는 거야?”

“나라고 뭐…. 그럼 그 평가액이 그렇게 종이짝이 될 줄 알았나. 다시 오를 때까지 기다려야지 뭐.”

“허이고…. 팔자 좋은 소리 한다! 우리 당장 이사 가야 되는데 그 돈 없어서 어떡하려고 그래! 당장 지금이라도 팔라고! 더 떨어지기 전에!”

“으이그!”

“당장 팔아!!”


나는 다급히 가방을 풀어 내려놓으며 말했다.

“어. 어어어. 안돼 안돼 안돼! 팔지 마!”

“넌 뭐여! 너도 니네 아빠랑 똑같아? 뭘 안다고 지껄여 지껄이기는! 넌 씻고 잠이나 자!”

엄마는 나를 보더니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엄마의 야단이 처음으로 위협적이지 않다. 하하하.

“아니라니까 엄마? 저거 오른다니까!”

“너 이게 뭔 줄 알고 그르냐. 부자가 쌍으로 지랄이네!”

“아니야 이번엔 진짜 아빠 한 번 믿어봐.”

아빠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이 자식이 뭘 안다고 자꾸 그래. 이게 얼만지 알아? 우리 당장 쓸 돈이 여기 다 들어가 있다고! 넌 신경 끄고 들어가서 공부나 해.”

“그래! 그러니까 괜찮아. 좋은 기회라니까!”


엄마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나의 목소리도 커졌다. 아빠는 자리에서 일어날 듯 말 듯 하며 나를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야 너네 둘이 짰어? 송 씨들끼리 짠 거야? ‘아빠 왜 그러세요, 정신 차리셔야죠’라고 말을 못 할망정 지금 편드니?”

하…. 답답하다. 이걸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엄마.”

“왜!!!!!”

어느새 엄마아빠 싸움은 엄마와 나의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흠.

“엄마. 내 말 잘 들어봐. 나 한 번 믿어 보고 만약 아니….”

“사기꾼들이 잘하는 말이 나 한 번 믿어보랜다.”

“엄마 내가 사기꾼이야? 우리 집 사기 치려고 여기 들어왔어? 잠깐 내 말 좀 들어보라니까!! 아휴. 답답해. 이러니 아빠가 기를 못 펴지.”

“뭐! 이 자식이!”

철썩!


엄마는 내 등짝을 후려치고는 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내가 설득해야 할 사람은 엄마가 아니라 아빠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는 엄마를 거실에 남겨두고 아빠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왜. 무슨 일이야? 너 이 주식에 대해 들은 거 있어?”

아빠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속삭였다. 아빠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 오랜만이라 기뻤다. 나는 왠지 신이 났다.

“아니 아빠. 엄마한텐 그냥 팔았다고 속이고 절대 지금 팔지 마. 그리고 내일 아침에 팔아.”

“뭐야. 너. 너너. 뭐 아는 거 있어?”

“아니 내가 지난밤 꿈자리가 좀 심상치 않았거든. 정말 좋아서 그래. 제발 아빠. 응? 아빠도 팔기 싫잖아.”

“뭐 그야…. 이게 아직 저평가되긴 했지…. 꿈이 뭐였는데?”

“아…. 그 꿈이. 돼지가 나왔는데 돼지가 금을 물고 우리 집에 막 들어오더라고. 한두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

“여러 마리?”

“어! 여러 마리!”


확신이 가득 찬 내 목소리는 아빠를 어느 정도 설득시킨 것 같았다. 나는 아빠에게 손가락으로 동그란 모양을 만들며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아빠도 진지한 표정으로 끄덕이며 동의했다. 주로 존재만 확인하던 아빠를 붙잡고 이렇게 긴 대화를 한 건 올해 들어서 처음이다. 아빠와의 대화가 꽤나 달콤해서 철이 든 기분마저 들었다.


굉장한 문제를 해결한 것 같아 신이 났고 콧노래를 부르며 씻은 후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날과 달리 어느새 엄마의 한풀이는 그쳤다. 그리고 두 분은 더 이상 싸우지 않으셨다.

나는 침대에 철퍼덕 누웠다.

… 가 벌떡 일어났다. 책상에 앉아 모든 현상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이것이 왜 시작됐는지. 어떻게 되는 일인지. 궁금했다.

‘난 오늘을 왜 다시 산 것일까?’’

오늘이 다시 시작되기 전 마지막 하루를 잘 기억해 보았다. 빨간 모자를 쓴 여자를 구하려다가 대신 차에 치인 것 같았으나 죽지 않고 다시 오늘로 복귀한 것. 차에 치인 순간부터 타임루프나 회기가 시작됐으니까 이 모든 것이 물리적 충돌 때문에 이루어진 것일까?


띠리. 띠리리리링!


인정 없는 알람 소리. 새벽 5시 반. 수학 공부를 더 하려고 맞춰둔 알람이지만 나는 새우처럼 옆으로 몸을 웅크리고는 달콤한 잠을 더 청했다. 이번 수학 시험 문제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와 아아아아 아! 봤지! 봤어? 봤어!”


방 건너편에서 아빠의 우렁찬 승리의 외침이 들려온다.

“뭐야 뭐야 뭔데?”

“올랐다고 올랐어!”

“자기 어제 그거 안 팔았어?”

“내가 말했잖아! 오를 거라고! 계속 오를 거라고!”

“어머어머 하하하하. 이게 웬일이래? 어머 여보! 어머어머.”

“나 한 번 믿어보라고 했지!”아빠가 그렇게 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그래 이제 그만하고 팔자. 팔아 팔아. 하하하하하하하하.”


엄마가 웃었다. 오랜만에 듣는 호탕한 웃음이다. 엄마와 아빠의 재산이 불려졌다.


“재윤아! 네 말이 맞았다! 네 말 듣기 잘했다!”


아빠가 내 침대로 뛰어 들어와서는 나를 으스러지듯이 안으며 말했다.

“네 돼지 꿈자리가 맞는가 보다! 이놈 시끼. 예지력까지 있네!”

“다행이야 아빠. 나 좀 일어날게.”

“어, 어.”

아무리 그래도 아빠의 허그는 아직 어색하다. 나는 아빠를 천천히 밀어내며 일어났지만 엄마 아빠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바카스를 마신 듯 기운이 난다. 엄마가 차려준 아침을 뚝딱 먹고 당당히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휘두르며 걸쳤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어, 그래 재윤아. 우리 아들 조심히 잘 다녀와!”

“네.”


정류장에 서서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회기나 타임루프에 대해서 생각했다. 회기 치고 너무 짧은 시간을 되돌아왔고 (고작 3일이다.) 타임루프라면 나쁘지 않은 그림이다. 이거 잘만 활용하면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게 아닌가! 시원한 초여름의 산들바람이 불자 나는 온몸으로 계절을 느꼈다. 무슨 다짐을 하듯 나도 모르게 주먹을 있는 힘껏 쥐고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했던 지난번처럼 나는 아파트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되돌아가는 건 어떻게 하는 걸까?’


뒤에서 뛰어 오는 소리가 나자 나는 본능 적으로 허리를 숙여 운동화 끈을 묶는 척을 했다. 그 바람에 내 뒤통수를 때리려던 도진이가 중심을 잃고 오히려 앞으로 꼬꾸라졌다.


“아이씨. 넘어질 뻔. 야, 웬일로 빨리 나왔냐!”

“어. 어.”

“뭐야. 표정 왜 이래? 뭐가 이렇게 신났냐.”

“닥치고. 잘생겨서 부럽냐.”

“그렇지? 너도 수학 공부 어떻게 돼 가냐? 아주 포기해서 실성했냐? 몇 단원까지 했어?”

“뭐 내가 언제는 공부했냐?”

“공부 안 하고 맨날 1등 하냐, 지랄. 허세는.”

“공부는 수업시간에 졸지 말고 선생님말 잘 듣고….”

“야 닥치고. 오늘 끝나고 같이 스터디할래? 마지막 단원이 좀 힘든데 나 좀 도와줘.”

“응. 도와주고말고. 도와줄 수 있지.”


넉넉해진 나의 마음에 말도 너그러워졌다. 게다가 나는 내일 볼 시험 문제를 알고 있다. 학원에 돈 백만 원 쏟아붓는 불쌍한 도진이에게 문제 몇 개 알려줄 생각이다. 나를 공부의 신으로 여길 테지. 우리 학교 수학 평균 점수는 80점이 넘지 않는다. 나는 인간미 있게 적당히 92점을 맞을 예정. 백점은 양심상 맞을 수 없다.


다음날 수학시험, 10분 만에 다 풀 수 있지만 시간 분배를 적절히 해가며 열심히 푸는 척을 했다. 마지막 시험인 3교시까지 끝나자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가채점을 하기 시작했다. 도진이가 매우 안타까운 표정과 함께 얼굴 옆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하, 이 문제! 고쳤는데 틀렸네!!!! 씨발.”

“그래서 40점?”

“82점.”

“오 왠열?”

“내 인생 처음 있는 점수야! 네가 연습문제로 만들어 준 것 중에 다섯 개나 나왔어! 뭐야 이 새끼 선생님 시험지라도 훔친 거야? 졸라 고마워!”

“그래 한평생 보답하여라.”

“내일 시험도 같이 공부할래?”

“내일 시험? 내일 시험은….”


내일 시험은 나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혼자 공부하고 집에 돌아가다가 사고를 겪었으니 어떻게 될지 궁금했다. 내가 어떤 일을 겪든지 나는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이 시점만 영원히 되풀이하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내일 시험이 뭔데?”

“국사, 영어, 과학.”

“그래 같이 공부하자. 학교 도서관 갈 거야?”

“어, 너랑 공부하니까 공부가 잘되는 것 같은데?”


드르르륵!


교실 문이 열리고 일진 무리가 나타났다. 그리고 제일 앞엔 승학이가 있었다.


“야, 송재윤. 내가 가방 돌려준 줄 알았냐.”

나는 다섯명즘 되는 무리들의 험악한 표정들을 보았다. 으헉. 망했다. 가방 사건의 전말의 끝은 역시 초죽음인가! 이 세상엔 왜, 정의란 없는 것일까! 이 새끼가 복수하러 왔다.

나는 도진이를 힐끗 보았다. 역시나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다. 도진이는 무슨 죄람! 승학이 뒤에서 승학이 두 배만큼 덩치 큰 놈이 우리 앞으로 나왔다. 그가 내가 아닌 도진이를 향해 주먹을 날리는 순간 나는 도진이를 내 뒤로 숨겼다.

“조심해!”


퍽!


“하, 이 문제! 고쳤는데 틀렸네!!!! 씨발.”

눈을 떠보니 도진이가 수학 시험 가채점 중이다. 분명 승학이 무리와 대치중이었는데! 다시 몇 시간 뒤로 돌아왔다!

“그래서 40점?”생각 없이 내뱉는 나의 대사도 똑같다.

“82점.”

“오….”

정말 타임루프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내 인생 처음 있는 점수야! 네가 연습문제로 만들어 준 것 중에 다섯 개나 나왔어! 뭐야 이 새끼 선생님 시험지라도 훔친 거야? 졸라 고마워!”

“그래 한평생 보답하여라.”

“내일 시험도 같이 공부할래?”

“잠깐. 나 할 일이 있어.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나는 가방 안에 있는 책을 다 꺼내어 서랍에 넣어 두고 빈 가방을 들고 복도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승학이가 무리를 몰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씨발. 졸라 무섭네.’


“승학아!”

나는 승학이를 향해 달려갔다. 마치 내가 먼저 그를 찾고 있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의 면전 앞에 가방을 들이밀었다.

“뭐야?”

“승학아 이 가방 너 줄게. 생각해 보니까 나보다 네가 더 잘 어울리더라고. 하하하하.”

“뭐야 이제 와서 무슨 수작이야. 나 쪽 줄 땐 언제고 씨발놈아.”

그가 나직이 말했다. 그의 작은 목소리만큼 나의 심장도 쪼그라들었다.

“아니 나 같은 애가 뭘 알았겠냐! 내가 너 무서운 줄 모르….”

승학이 뒤에서 이인자가 자신의 덩치를 드러내며 나왔다. 그는 나의 멱살을 잡고 팽기치듯 내려놓더니 발로 내 허벅지를 내리쳤다. 순식간이었다.

퍽퍽퍽!

그렇게 몇 대를 더, 아까보다 더 많이 맞았다.

‘하… 개 같은 작전이었네.’


내 가방은 이미 승학이 손에 있었고 승학이는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 손에는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면도칼을 들고 가방을 찢기 시작했다.

“아아 아안 돼! 그건 제발 조심해 줘!”눈을 질끈 감았다.


“하, 이 문제! 고쳤는데 틀렸네!!!! 씨발.”다시 도진이의 가채점. 또 돌아왔다.

“그래서 82점?”

“오우 씨 대박. 어떻게 알았어? 너 이제 이런 것도 맞춰?”

곧 승학이 무리가 온다. 뒷덜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내 인생 처음 있는 점수야! 네가 연습문제로 만들어 준 것 중에 다섯 개나 나왔어! 뭐야 이 새끼 선생님 시험지라도 훔친 거야? 졸라 고마워!”

“야 너 싸움 잘해?”

“어? 갑자기?”

“너 예전에 유도했었잖아. 검은띠라며.”

“그… 그렇지? 사실 나 대회 나가서 상도 탔어.”

아까 타이밍을 못 맞춰서 얻어터진 거지. 덩치 큰 놈의 주먹이 생각보다 약했다. 나는 옆에 있던 준호와 기태, 성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네도 싸움 잘해?”

“나… 나나?”그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의아해한다.

“어, 사람 쳐봤어?”

그들은 두려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웬 싸움 타령이야? 누구랑 싸우게? 승학이랑 또 싸우러 가려고? 아서라 아서. 그때 너 안 맞은 거 다행으로 알아.”

“걔 나보다 작아.”

“근데 걔는 진짜 사람을 때려본 애고 우린 장수풍뎅이만 죽어도 마음 아파하던 사람들인데 어따 비교해.”

“하지만 더는 뒤로 물러날 수 없어.”

“무슨 소리야? 뭐 이제는 앞으로 간단 소리야?”


드르르륵!


승학이의 무리가 나타나자 도진이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도진이에게 ‘싸우자’라는 확신의 눈빛을 보냈다.

“송재윤.”

“최승학.”

덩치 큰 놈이 앞으로 나오자 나는 주저 없이 펀치를 날렸다. 그리고 몇 번의 발길질을 더 하자 의외로 그놈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도진이는 그런 나를 보고 힘을 얻어 두 번째로 덤비는 놈을 들쳐 업고 내리꽂았다. 본인도 본인 기량에 놀랐는지 헛웃음을 남발했다.

승학이와 나머지 무리들이 뒷걸음질 치자 도진이 뒤에 있던 세 친구들이 으름장을 놓으며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승학이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문 밖으로 나간 상태.

“꺼져.”

나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승학이는 나를 한껏 째려보더니 교실 밖을 나갔다.


“야 공부하러 가자.”

“우우오오오오오오얼.”

친구들의 환호 소리와 함께 우리는 교실로 나섰다. 나는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도서관에 갔다가 집에 걸어갔던 그때와 다르게 나는 도진이와 학교에서 늦게까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시험까지 다 보고 다시 타임루프 안으로 돌아가 다시 시험을 치르면 모든 시험을 다 잘 볼 것 같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흥분을 감출 수 없는 내 표정을 도진이는 기가 막히게 캐치해 냈다. 그는 바나나 우유 빨대를 쪽쪽 빨다가 말고 말했다.

“너 연애하냐?”

“뭐?”

“왜 이렇게 신이 났어? 기분 나쁘게. 그만 좀 쪼개.”

“너랑 온종일 붙어 있는데 내가 누굴 만나 연애를 하겠냐.”

“네가 그렇게 웃상이었다고?”

“시험 잘 봐서 그런다. 왜.”


나는 의도적으로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기에 횡단보도를 건널 일이 없었고 빨간 모자 여자를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차량 사고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의구심이 들었다. 어떻게 타임루프를 이용하게 된 걸까. 그리고 앞으로 다시 쓸 수 있을까? 여러 번 쓰기도 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그 빨간 모자 여자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승학이를 때린 이후 과거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다.

평상시 겁이 많아 다치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나는 일부러 물리적인 충격을 주려고 했지만 어디에 부딪힐 엄두가 도무지 나질 않았다. 물리적인 충격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잠시 가졌지만 아무래도 실험을 해봐야 될 것 같았다.


공동 현관문 앞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려는데 옆으로 회색 빛 아파트 외벽이 보였다. 저기에 부딪혀 보자.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몇 번의 심호흡을 끝낸 후 아파트 외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날려 점프해… 야 하는 데.

급 제동을 걸어 벽 앞에서 다소곳이 섰다.

‘하….’

아픈 건 도무지 할 수 없는 사람인데 처음 보는 빨간 모자 여자를 구해줄 용기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거야? 그 짧은 찰나에. 참나.


나는 다시 뒤로 몇 발자국 갔다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다시 뛰었다. 이번엔 제대로 몸을 외벽에 던졌다.


“아아아아.”

그리고는 흙바닥에 철퍼덕 넘어졌다. 아픈 것보다 창피함이 몰려왔다. 하얀색 푸들이 지나가다가 나를 발견하고 연신 짖어댔다. 개 주인이 누워있는 나를 보고 비명을 질러대자 나는 급하게 일어서며 괜찮은 척했다. 개주인 누나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학생?”

“아…. 네. 네. 넘어졌어요. 괜찮아요.”

나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잡고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타임루프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겁 많은 내가 매번 이런 충돌을 하는 건 역부족이다. 내일 당장 있을 시험이 문제가 아니다. 내 인생을 통째로 바꿔줄 타임루프의 패턴을 알아차리는 것이 우선이다.

도대체 무엇일까. 그냥 과거의 날짜를 생각하면 될까? 미래로 갈 수 있을까?

바지에 묻은 흙먼지를 털었는데 뒤에 따라오던 하얀 푸들 코를 간지럽혔는지 강아지는 심한 기침을 해댔다. 그리고 몸을 부르르 털었는데 그 바람에 개주인 누나는 강아지 목줄을 놓쳐 버렸다. 하얀 푸들은 이때다 싶어 전속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 요망한 것은 토끼처럼 잘도 뛰었다. 나는 그 푸들을 잡으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 흰색 푸들은 돌고 돌아 마침내 아파트 정원 한편에 있는 분수대 안으로 점프하려고 들었다.

“안돼 쿠키야!!!”

개주인 누나가 푸들을 잡으려고 분수대 위로 올라가 앉아 버렸다. 누나는 겁 없이 분수대 난관 위를 올라갔고 아슬아슬하게 걷기 시작했다. 푸들도 어찌할지 몰라 낑낑거리기만 할 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문제는 강아지가 아니라 이 누나였다. 누나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누나가 떨어질까 봐 조마조마했다. 세 발만 더 가면 푸들을 잡을 수 있지만 아무래도 위태롭다. 한 발만 남긴 거리에서 누나가 오른발을 떼자 양팔을 휘두르며 심하게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안돼!


“조심해요!”


“재윤아!”


도진이가 날 불렀다.

“시험 잘 봐라.”

눈을 떠 보니 여긴 교실. 수학 시험 전이다. 또 타임루프 안에 들어왔다. 다시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물리적 충돌은 없었다. 내가 했던 행동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생각은? 개주인 누나가 다칠까 봐 전전긍긍했었다. 말은? 조심해!라고 했다.

그것일까? 선생님이 들어오시고 시험은 시작됐다. 나는 갑자기 신이 났다. 타임루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모두들 시험지에 고개를 처박고 집중하는 데 나는 난데없이 소리 질렀다.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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