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해!”
여긴 도서관. 도진이와 공부했던 곳. 다시 뒤로 시간 여행을 했다. 대박.
타임루프의 암호는 ‘조심해’이다. 생각보다 쉽고 간편하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하지만 왜일까? 사는 동안 수도 없이 했을 말인데. 뭐가 이것을 시작하게 만들었을까. 하지만 그런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그냥 신이 났다.
나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도진이와 헤어진 후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종이와 연필을 꺼내 초등학교 이후로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시간 계획표를 세웠다. 일단 기말고사 끝날 때까지 시간이 흘러가도록 놔두기. 그리고 기출문제 파악을 해 놓기.
그리고 기말고사를 두 번 반복하고 전교에서 1등이 되었다. 물론 나의 덕을 본 도진이의 성적도 눈에 띄게 성장했다. 루프를 활용하는 기술도 점점 늘어났다. 단순히 ‘조심해!’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주목할 수 있도록 소리 지르듯 ‘조심해!’를 해야 한다. 원하는 시간대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다. ‘조심해’라고 말하는 순간에 가고 싶은 장면을 떠올리면 되었다.
나는 단번에 전교 1등을 한 레전더리 한 존재가 되었다. 천재가 싸움까지 잘한다더라며 모두들 내 귀에 들릴만큼 수군거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루머는 ‘일진 승학이도 재윤이한테 쨉이 안 된다’였다.
내가 복도로 지나가면 두세 명 정도가 얼굴을 맞대고 무어라 말하면서 손으로는 나를 가리켰다. 그러면 나는 그들의 행동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듯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친구들의 호의적인 표정에 나는 우쭐했다.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애들이 힐끗힐끗 쳐다본다. 그건 착각인가.
여하튼 그즈음이었다. 내가 그녀를 발견한 때는.
그날도 하교 시간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 교실문에서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보통 학생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큰 나는 그날도 쇼트트랙 선수처럼 붐비는 아이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아주 빠른 속도로 학교밖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약 50미터 앞쪽에서 갑자기 유독 빛이 나는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실크처럼 빛나는 긴 생머리는 물속에서 흐느적거리는 물풀처럼 아름답게 휘날리고 있었다. 그녀가 그 긴 머리카락을 귀로 넘기며 나를 향해 뒤를 돌아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쳐 나와 못해 헛기침을 연신 해댔다. 그것은 처음 있는 생리현상이었다. 난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웃은 적이 없었다. 갑자기 기분 좋게 만들어 버리는 저 천사 같은 얼굴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한눈에 반한 것일까. 그녀는 뒤따라 오던 친구와 꺄르르 웃다가 가던 길을 가기 위해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하하하하. 뭐가 재밌을까. 나는 그녀를 앞지를 생각이 없어 갑자기 거북이걸음을 했다.
“야, 왜 갑자기 천천히 가!”
뒤따라오던 도진이가 본인의 스피드를 제어하지 못하고 거의 급정지한 나의 등에 부딪혔다.
“어, 미안. 근데 야. 야.”
“왜!”
“누구야? 응?”
나는 턱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도진이에게 속삭였다.
“아. 쟤? 우리랑 같은 학년이야. 다연이라고. 나랑 같은 학원에 다녀. 왜? 왜?”
“음….”
“오오오오. 예쁘지?”
“너 쟤랑 친해?”
도진이는 내 표정을 읽고는 곧 터져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아내며 뛰어갔다. 불안하다.
“야 이다연!”
그리고 저 예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다연이라고? 도진이는 나를 보란 듯 다연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앞서서 걸어가고 있었다. 괜한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도진이가 나를 향해 뒤돌아보고 그 여자애한테 뭐라고 얘기하더니 나에게 이쪽으로 오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나는 저 새끼의 꾸물거림 없는 오지랖이 부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딴청을 했다. 원래부터 긴 생머리 너한테 정말 관심이 없었다는 듯.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아이들을 보는 것에 몰두하는 척했지만 심장은 주책맞게 뛰었다. 글쎄 왜인지 모르지만 저 새끼한테 소개받고 싶진 않다.
“아아아악.”
펑!
운동장에서 축구하던 녀석들이 공을 이리로 던지는 바람에 다연이가 머리에 축구공을 맞았다. 이런! 그녀는 딱딱한 축구공을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도진이는 축구공을 던진 축구팀을 향해 괜히 큰 소리를 질렀고 주변 친구들은 주저앉아 있는 그녀를 감쌌다. 나는 그녀가 너무나도 안타깝고 궁금했지만 그녀에게 달려 나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멍청하게 발만 동동 굴렀다. 그때 타임루프가 퍼뜩 생각났다.
헉. 그래! 그거야. 날아오는 공을 내가 멋지게 막아 줘야겠다! 이렇게 당황해서 이도저도 못하지 말고. 기다려 나의 생머리!
나는 얼른 외쳤다.
“조심해!”
아이들이 교실밖으로 쏟아지는 하교 시간으로 복귀. 복도에서 그녀를 다시 마주쳤다. 나는 그녀와 멀지 않은 거리를 유지하면서 뒤를 따라갔다. 그녀가 드디어 교실 밖으로 나가고 예상대로 축구공이 날아오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달려 나가면서 날아오는 축구공의 포물선을 눈으로 따라가며 발차기할 발높이를 계산했다. 그리고 멋지게 걷어찼다.
펑!
“헉….”
“꺄악아아아아아악!”
여자애들의 비명소리. 아니 그녀의 비명소리.
내가 멋지게 찬 축구공이 바로 앞에 있는 그녀의 얼굴에 가격했다. 헉…. 뽀얀 얼굴에 흐르는 그녀의 쌍코피와 원망 섞인 눈빛. 안돼 안돼 안돼. 이건 아니다. 조금 긴장한 탓에 각도 계산을 잘못했다.
하늘을 보고 다시 외쳤다.
“조심해!”
학교 밖을 향하는 그녀 뒤로 날아오는 공을 발견했다. 이젠 조금 더 앞으로 가서 공을 뻥 차 줬다. 그녀는 놀래서 나를 한 번 힐끗 보고 다시 날아가는 축구공을 한 번 보더니 그제야 상황파악을 한 모양이다.
“고…. 고마워.”
“큰일 날 뻔했네. 괜찮아?”
나는 묻은 먼지도 없으면서 괜히 바지를 툭툭 털었다. 무심해 보이고 싶었다.
“어…. 덕분에 괜찮아.”
그녀가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용기를 얻은 나는 샘솟는 자신감을 제어하지 못한 채 좀 더 나갔다.
“이다연이네. 몇 반이야?”
“내 이름 어떻게 알아?”
“하하. 이름표에 쓰여 있잖아.”
“나 2반.”
“난 송재윤. 4반이야.”
“아…. 안 물어봤는데….”
“어. 하하하. 혹시 궁금해할까 해서. 하하하.”
그녀의 미소가 사라지고 있다. 축구공을 차고 시크했던 나의 목소리는 점점 애가 타서 안달 난 목소리로 변하고 있다. ‘이건 멋지지 않아.’
나는 다시 눈을 딱 감았다.
“조심해!”
“어?”
나는 다시 그녀와 학교 밖을 나왔다. 그녀에게 날아오는 공을 멋지게 걷어차고는 멀리 날아가는 공을 쳐다보며 물었다.
“괜찮아?”그리고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어. 어. 고마워.”
그녀의 옅은 미소를 보고 나는 돌아섰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꼴값 떨지 말자. 내가 잘생기긴 했지만 한눈에 반할 만큼 잘생기진 않아서 섣불리 적극적이었다간 낭패보기 십상이지.
이다연.
그때부터 나는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그 이후로도 오며 가며 만나긴 했지만 너무 찰나적이어서 애간장만 탈뿐이었다. 아니 솔직히 난 더 적극적이었다. 그녀의 반 앞을 그녀가 날 바라봐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조금 천천히 지나가기도 했다. 삼삼오오 모여있던 여자 애들이 귓속말을 하면서 나를 쳐다보고는 수줍게 웃는걸 몇 번 보았다. 이놈의 인기란! 그중에 그녀도 그런 무리에 섞여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나를 봤는지 안 봤는지는 모른다. 나는 체육선새님에게 2반과 짝피구를 하자는 제안도 했다. 한마디로 친선경기. 하지만 선생님은 큰소리로 면박을 주셨다.
“너 2반에 좋아하는 여자애 있냐!”
어떻게 아셨지? 선생님도 타임루프를 하시나? 나의 제안은 ‘쓸데없는 소리’로 종결되며 무참히 짓밟혔지만 그러길 다행이다. 선생님의 독심술이 있는 곳에서 연애하고 싶지 않다.
나는 타임루프를 반복해서 그녀가 특정한 시간에 가는 특정한 장소를 알아내었다. 그녀는 도진이와 같은 학원을 다니는데 그곳에 가기 위해서 꼭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 5시 즈음이면 서 있었다. 나는 미리 도착해서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만들었다. 그녀는 항상 무엇에 열중한 느낌이라 주변을 살피다 나를 알아채는 법은 없었다. 무언가 드라마틱한 일이 필요했다. 갑자기 넘어진다던가 하는. 나는 일부러 넘어지는 척하며 그녀와 부딪히려고 했으나 그녀는 귀신같은 타이밍으로 앞으로 전진하곤 했다. 그 바람에 나는 바보처럼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고 그녀와 접촉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의자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지갑을 떡하니 놓고 가는 것이 아닌가! 신이시여! 나에게도 기회는 오는군요! 나는 얼른 지갑을 주었다.
“저기…. 여기 지갑 떨어졌어. 이거 놓고 갈 뻔했네.”
그녀는 재킷 주머니를 확인하더니 본인의 지갑을 내가 들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귀엽고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어 고마워.”
“어? 축구공 맞을 뻔한 애네.”나는 그녀와 같이 버스를 타면서 말을 섞었다.
“어. 어. 그때도…. 고마워.”
나의 발연기를 알아챈 것처럼 그녀의 반응이 뜻뜨미지근하다.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너 이쪽에서 맨날 버스 타는구나?”라고 말하자마자 나는 고개를 돌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의도하지 않는 이상한 목소리였다. 본능적으로 감지한 나의 어색함에 온몸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응.”
그녀의 대답은 차갑디 차갑다. 그녀는 나에게 최대한 예의만 차렸지 속내는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젠장.
“너 이름이 뭐야?”
“이다연.”
“난… 송….”
“재윤.”
그녀가 내 이름을 말했다! 역시 요즘 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구나. 너 조차 나를 알고 있다니!
“어? 어떻게 알았어?”
“도… 도진이가 알려줬어.”
나의 급발진하는 화색에 그녀가 잠시 당황했다. 당황하는 그녀의 표정도 너무 예쁘다.
“도진이가? 나에 대해서 말했어? 뭐라고 말했어? 설마 욕은 안 했지? 하하하.”
“이름만 말했어. 축구공 차 준애가 송재윤이라고.”
“아하하하하하하하. 그랬구나. 도진이랑 나랑 같은 반이야.”
“응….”
그녀는 또다시 별로 관심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니라 도진이가 싫은가? 도진이 얘기는 그만하자.
“그럼 잘 가. 난 다음 역에서 내려.”
“자.. 자잠깐. 학원 끝나고 뭐 해? 내가 커.. 커피라도 사줄까. 그. 캔커피 말이야. 학원 앞 편의점에서.”
“나 늦게 끝나는데….”
“나도 독서실에서 늦게까지 공부해. 하하하하.”
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나의 적극적 대시가 좋긴 좋았나 보다. 나는 버스에서 내리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창가에 비친 헤벌레 한 내 모습을 보고 질색했다.
‘정신 차려. 좀.’
밤이 되자 조금 더 흥분했고 조급해졌다. 그녀에게 완벽하고 멋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나는 다연이의 학원 시간이 끝날 즈음 나는 학원 앞에 편의점에 도착했다. 도진이를 통해 이미 다연이가 좋아하는 음료를 알아 놓은 상태. 나는 커피를 미리 사 두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탁!
누군가 나의 어깨를 쳤다. 뭔가 조짐이 좋지 않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