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무지 순조롭지 않아

by 봄남

탁!

누군가 나의 어깨를 쳤다. 뭔가 조짐이 좋지 않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역시 도진이었다.


“여기서 뭐 해?”

“너 학원 벌써 끝났어?”

“응 방금.”

나는 행여나 그녀를 놓칠세라 창문 밖 학원 건물에서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을 일일이 스캔했다.

“여기서 뭐 하냐고.”

“아…. 그냥 우연히 지나가다가 들렸어.”

“우리 학원 앞을? 네가 다니는 도서관은 여기서 반대편이잖아. 그나저나 그 커피 나 주려고?”

“어? 어.”

“다연이가 좋아하는 커피네. 이거 다연이 주려고 산 거야?”

“다연이가 좋아하는 커피? 아 다연이가 좋아한다고 그랬지? 너 마셔.”


나는 커피를 하나 건네며 한숨을 쉬었다. 그가 보는 앞에서 일을 그르치고 싶진 않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창피했다. 매우 개인적인 일이라고. 똥을 싸다 걸린 느낌이랄까.


“조심해!”


어쩔 수 없다. 나는 다시 돌아와야 했다. 도진이가 오기 전에 커피를 사고 편의점을 빠져나와 학원 옆 건물 안으로 피신했다. 도진이가 학원문에서 편의점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큰일 났다. 간단한 간식을 사고 바로 나올 줄 알았던 도진이는 편의점에 눌러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여기서 만나는 건 위험하다.


“조심해!”


나는 다시 그녀와 대화하던 버스 안으로 돌아왔다.


“이따가 학원 끝나고 뭐 해?”

“집에 가지.”

“지… 집에 바래다줄까?”

“응? 왜?”

“그러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나 엄청 늦게 끝나거든.”

“그! 그러니까. 밤늦게 위험하니까. 내가 같이 집에 가줄게. 나도 독서실 끝나고 혼자 집에 가는 거 심심하니까.”

“우리 집이랑 같은 방향이야?”

“그래… 야 될걸?”손에 땀이 차고 성대가 조여오는 것 같다.

“하하. 뭐…. 그래.”

그녀가 드디어 웃었다. 나는 그녀의 웃음을 간신히 얻어내어 기분이 좋으면서도 도무지 순조롭게 되는 일이 없다고 느꼈다. 휴…. 나의 우왕좌왕했던 어색한 말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머리를 뜯고도 모자라 쥐어 짜내는 비명을 질러야 속이 편해졌다.


일전에 나는 도진이를 통해서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 음악, 취미 등을 알아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소재로 대화하면 그녀가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조심해야 한다. 지나쳤다간 되려 비호감이 될 수도 있다. 학원이 끝나는 시간. 도진이가 걸어 나온다. 그리고 약 5분 후 그녀가 나타났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가 좋아하는 커피를 건네주었다.


“어! 내가 좋아하는 커피네?”

“너도? 나도 이거 좋아하는데!”


약간의 어색한 기류가 흘러서 나는 빨리 화제를 돌렸다.


“학원에서 어떤 과목 배워?”

“수학이랑, 영어랑. 요즘 부쩍 어렵네.”

“나… 나랑 같이 공부할래? 내가 공부 좀 하잖아. 모르는 거 있으면 서로 물어보고 도와주고 어때?”

“음…. 난 학원 다니는 것만으로도 벅차.”

“그럼 학원을 다니지 마. 나랑 공부하자. 도진이도 나랑 공부하고 성적이 급등했어.”


내가 답을 다 알려줄게.


“글쎄…. 난 공부를 잘해야겠다는 욕심이 없어서.”


그녀가 애써 웃었다. 내가 너무 잘난 척했나 싶어 마음을 다잡았다.


“그… 그… 그렇지! 공부가 다가 아니지! 하하하하.”

나는 걷다가 나도 모르게 앞에 보이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걷어찼다. 뜻대로 되지 않는 전개에 화가 났다.

“그럼 며칠 전 개봉한 그 영화 보러 갈래?”

“갑자기?”

“내일 토요일이니까. 하하.”

“난 남들이 다 보는 인기 있는 영화나 드라마는 잘 안 보는 편이야.”

참으로 똑 부러지는 여자. 주관이 또렷한 여자.


“아. 사실 나도 그래. 그러면, 아침 달리기… 할까?”

그녀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췄다. 왜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어?”

“나 꼬시는 거야?”

그녀의 질문이 신선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지금 그녀의 표정이 뭔지 모르겠다. 역시 내가 지나쳤나 보다. 잘 보이려다가… 조급해하다가 망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음…. 음…. 어.”

“하하하하하하.”

갑자기 그녀가 웃는다. 나는 나도 모르게 가둬 놓았던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왜…. 웃어?”

“나랑 사귀려고?”

“…어.”

“왜?”

“왜? 왜라니. 음… 그러니까. 넌.”

그녀가 내게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두근 대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넌… 예… 예쁘니까.”

그녀의 눈은 나의 고백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쏘아보는 눈빛인지 응시하는 눈빛인지 헷갈리기 시작하자 나는 조금 위축이 되었다. 그냥 다시 과거로 돌아갈까? 이번 건 망한 시나리오 같은데….


“알았어.”

“그… 그게 다야?”

그녀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뒤따라 걸으며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니 가만히 보면 타임루프를 쓰는 사람은 나인데 왜 내가 조종당하는 것 같지? 내가 그녀를 설레게 할 순 없는 것일까?


“미안한데 난 널 잘 몰라.”

“알아가면 되지.”

“… 음. 글쎄. 네가 지금 나한테 고백한다면 내 대답은 노야.”

그녀가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뭐야. 역시 너무 오버한 거야? 에잇 모르겠다. 연습했다 치고 다시!


“조심해!”


그녀의 학원 앞.

“다연아. 이거 마실래?”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가 좋아하는 커피를 건네주었다. 이번엔 내가 생각해도 좀 더 멋있고 자연스러웠다.


“어! 내가 좋아하는 커피네?”

“너도? 나도 이거 좋아하는데!”


그녀가 아까보다 더 많이 웃는다.

“요즘 공부하는 거 힘들지?”

“어…. 어떻게 알았어? 이번에 새로 들어간 챕터 진짜 어려운 거 같아.”

“맞아. 그래도 너무 스트레스받지 마. 공부가 다가 아니니까.”

나는 그렇게 멋진 말을 하고는 커피를 들이켰다. 그녀도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들이켰다. 나는 조심스럽지만 자신감 있는 말투로 물었다.


“영화 좋아해?”

“응. 넌?”

“난. 남들이 다 좋아하는 영화는 안 보게 되더라고. 며칠 전 개봉한 그 영화도 아직 안 봤어.”

“어! 나돈데! 나도 왠지 모두가 열광하는 드라마나 영화는 괜히 심술이 나서 보기 싫더라. 하하하하.”

“응. 맞아.”

그녀는 손뼉을 치며 맞장구쳤다. 아까보다 분위기는 더 좋다.


“저기… 앞으로 학원 끝나면 내가 계속 데려다줘도 돼?”

“…. 응. 고마워. 저번에 축구공에서 구해준 것도, 떨어진 지갑 주어준 것도. 그리고 지금도.”

“우리… 자주 만나네? 이렇게 자주 만나는 것도 인연이다!”

“그러게.”


그녀는 나와 헤어지는 마지막까지 예쁜 미소를 지었다. 나는 평상시에 자주 하던 바보스러운 웃음소리를 절제하고 미소만 지으며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후로 나는 완벽한 데이트를 위해 타임루프를 돌릴 작정으로 하루를 대충 지켜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날도 나는 화장실 방향과 반대인 2반을 스리슬쩍 지나쳤다. 2교시가 시작되기 전 여전히 차분한 아침이었다. 그때 창문 너머로 귀를 찌르는 여자들의 싸움 소리가 들렸다.


“뭐 이년아!? 이년이 자꾸 거짓말하네?”

“무슨 소리야.”

“네가 가져갔잖아. 내 이어포온!!”


아이들이 그들의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도 덩달아 무리를 이루며 섰다. 그런데 그 아이가 소리 질렀던 ‘이년’은 다연이었다! 다연이는 앉아 있었고 초연한 상태였다.


“쟤야 쟤. 이수아. 너 좋다고 광고하고 다니는 애. 2반에서 유명하던데? 송재윤빠라고? 쟤네 아빠 판사님이셔. 실제로 아빠가 개입하진 않는데 엄마가 엄청 드세다는 소문이 있어. 그래서 쟤한테 잘못 걸리면 1년이 괴롭다나? 근데 수아랑 다연이랑 지금 대치 상황이야?”

도진이가 어느새 다가와 빠르게 속삭였다. 그런데 다연이가 도둑년?


“난 이어폰 쓰지도 않는데 무슨 소리야?”조용하지만 또박또박 말하는 다연이. 내 가슴이 다 조마조마하다.

“야! 뒤져.”


이수아라는 애 뒤에 있던, 그러니까 이수아의 똘마니로 추정되는 두 명의 여자애들이 갑자기 다연이에게 몰려들어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건 누가 봐도 학폭인데.

한 여자애가 가방을 뒤집고 털기 시작하자 책과 여러 물건들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졌다. 거기엔 이수아가 말하는 본인의 이름이 새겨진 이어폰이 있었다. 헉.

이수아는 팔짱을 낀 채 콧방귀를 한 번 뀌더니 앉아 있는 다연에게 다가갔다.


“야 이래도 안 보여? 도둑년. 좋게 말할 때 시인하지 지금 너 졸라 쪽팔려졌잖아. 이렇게 머리 나쁜 애들은 꼭 추한 꼴을 당해봐야 순순히 내뱉는다니까.”

“난 훔친 적 없어! 너희들이….”

“차아암 나. 훔친 적 없는데 이게 왜 네 가방에 있냐고. 이 도둑년이 아직까지도 정신을 못 차렸네!”

수아는 땅에 떨어진 이어폰을 줍고는 다연이를 노려 보았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다연이만 알아들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말했는데 여기까지 들리진 않았다.

그러고는 발로 다연이의 가방을 짓밟고 지나갔다. 그리고 동그랗게 만들어진 무리를 두 손으로 흩더니 길을 내며 나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어? 아… 안녕. 송재윤….”


이수아는 머쓱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다연이한테 소리 지르는 것처럼 크고 못되게 말해보지? 그 목청 다 어디로 간 거야? 나는 그녀를 한동안 많이 노려보았다. 수아는 고갯짓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더니 두 친구들과 함께 교실 밖으로 사라졌다.


딩동댕동!


수업종이 울렸다. 학생들은 서둘러 본인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 짧은 쉬는 시간에 이런 드라마를 만들어 내다니 대단하다 이수아. 그것도 다연이에게! 용서하지 않겠다.

나는 시간을 돌려 이 사건의 전말을 알아보려고 했다. 문제는 우리 반이 아니라 사건 파악이 쉽지 않다는 점. 다연이 가방 속에 어쩌다가 이수아 이어폰이 들어있던 걸까.


학교 후 버스 정류장에서 다연이를 만났다. 그토록 친밀하고 아늑한 버스 정류장은 없을 것이다.

“다연아.”

“안녕.”

“아까…. 학교에서 이수아랑 실랑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야?”

“아…. 그거… 봤어?”

그녀는 민망했는지 살짝 웃었다. 그녀의 모든 표정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착한 표정을 지어도 사람을 굴복시켰다. 그녀는 이어폰을 훔칠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난 또 괜히 미안해졌다.


“어 그냥 지나가다가. 괜찮아?”

“어 난 괜찮아. 걔가 소리 지를 땐 나도 움찔했는데…그래서 뭐?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아.”


그녀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는 초연한 얼굴. 생각보다 다연이는 강한 여자였다.


“다짜고짜 너한테 왜 그 난리를 피운 거야?”

“이수아가 오해가 좀 있었던 것 같아. 나는 걔 이어폰을 훔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내 가방 속에 있더라고. 누군가 일부러 넣어둔 게 아닐까 싶어. 난 정말 아니거든….”

“일부러? 누가? 왜?”

“모르지 나야.”

“혹시 이수아가 넣어 둔 걸까? 둘이 원래 친해?”

“아니. 이름만 아는 정도. 평상시 인사도 안 하고. 정말 모르겠어. 수아는 성질이 나쁘긴 해도 그렇게 치사한 짓을 할 애는 아니라고 생각해.”

“가방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때는?”

“오늘 아침에 집에서 나오기 전 가방 쌀 땐 그 이어폰 없었는데! 걔네들이 내 가방을 뒤질 때 수아 이어폰이 나와서 나도 정말 놀랐어.”

“중간에 자리를 비우거나 한 적은 없었고?”

“그러고 보니 1교시 시작 되기 전에 화장실 갔다 오긴 했어. 그때가 유일해. 그 사이에 애들이 일부러 내 가방에 이어폰을 집어넣은 거라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왜 그랬을까?”

“그러게….”


이상한 점이 한 두 개가 아니다. 둘이 평상시 접점이 없다는 점. 이어폰을 잃어버렸는데 찾는 노력이 없고 별 다른 용의자들이 없이 다연이만 도둑으로 몬다는 점. 역시 타임루프를 이용해 알아봐야겠다.

오늘 아침으로 되돌아갔다. 아침 일찍 등교해서 2반에 가볼 참이다. 구석에 앉아 있는 2반 남자아이와 화하면서 다연이 자리를 살폈다. 다연이는 정말 1교시 시작 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다연이가 다시 되돌아올 때까지 다연이 자리에 가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미궁에 빠졌다. 다연이가 잠시 화장실 갔다 온 사이에 이수아가 다연이 가방에 이어폰을 넣었을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1교시가 끝난 후 나는 다시 2반에 갔다. 이번에는 좀 더 빨리. 다연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고 이수아와 두 친구들은 모여 앉아 키득키득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 수아가 오른쪽에 있는 친구에게 자신의 이어폰을 건네주는 것을 보았다. 그 이어폰이다! 그리고 그 친구가 다연이의 가방을 털던 애다. 그럼 가방을 털 때 같이 떨어뜨린 거라고? 나는 분노가 차올랐다.


“이수아.”

나는 교실 친구들이 다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수아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다. 아니 좋아하는 표정이다. 젠장.

오오오오오오오. 반 친구들의 반응. 나는 다연이를 슬쩍 봤지만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그게 좀 서운하긴 하지만 차라리 잘됐다.

나는 세 친구의 무리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수아는 오른손으로 머리카락을 꼬고 있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


도둑년 어쩌고 할 때의 목소리와 정말 다르다. 그 사건을 모르고 봤으면 깜박 속을 뻔했다. 청순하고 여린 소녀의 이미지다.

“소문이 우리 반까지 났던데. 네가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르고 다닌다고.”

“어머. 하하… 누가 그래? 어우 야. 그럴 리가.”

“음. 됐고. 나 국어책 좀 빌려줄래? 다음이 국어 시간이라.”

“어머… 굳이 나한테? 여기.”

그녀는 몸을 베베 꼬며 말했다. 나는 이어폰을 들고 있는 옆에 있는 친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이어폰도 빌려 주면 안 돼?”

“아 이것도 내 거야. 빌려줄게. 다음에 만날 때 꼭 가져와.”

그녀가 친구에게서 냉큼 이어폰을 뺐더니 나에게 주었다. 이수아는 머리를 귀 뒤로 연신 넘기면서 웃어 보였다.


딩동댕동!


2교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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