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정말 터지는 건가? 우리가 일을 해결하는 거잖아. 넌 어때? 떨려?”
“글쎄.”
“아니면 우리 삽질하는 걸까?”
나는 다연이를 바라보았다. 다연이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앉아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너의 시선은 언제쯤 나를 향할까.
유난히 더웠던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었다. 교실 분위기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도진이가 오기 전까지는. 오랜만에 본 도진이는 통통하게 살이 올랐다. 키도 커진 것 같다. 그는 오자마자 가방을 던져버리고 핸드폰을 들이밀며 긴급 속보를 전하듯 다급하게 말했다.
“야 야, 이번에 새로 나온 아이돌 알아? 솔로가수.”
“누구?”
“이름은 예지. 졸라 예뻐.”
“언제 나온 애야?”
“아직 데뷔 안 했어. 예쁘지? 예쁘지. 오늘 저녁에 첫 방송인데 나오기 전부터 벌써 난리도 아니야. 호미 기획사에서 엄청 아끼는 애라고 숨겨놨다가 나오는 앤 데, 예쁘다고 소문이 쫙 퍼졌어. 팬클럽도 벌써 생겼을걸? 준호랑 기태는 직접 보러 쇼케이스에 간데.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았지? 부러운 새끼들.”
김예지는 결국 데뷔를 하는 것 같았다. 오기자님 말대로라면 그녀가 이소연 사건을 묵인해 주는 조건으로 데뷔한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쇼케이스에 기자님이 가기로 되어 있다. 아마도 데뷔 쇼케이스 기자 회견 같은 것이 준비되어 있나 보다. 대형 기획사인 만큼 신인가수도 확실히 밀어주는 느낌이다.
며칠 전, 그녀가 그들의 데뷔 조건을 수락을 했다는 소리를 오기자로부터 듣고 나는 급하게 김예지를 찾아갔다. 그녀가 소연누나의 일기장까지 그들에게 넘겼을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순진하고 착한 눈을 하고 사람 뒤통수를 치다니 역시 여자말은 다 믿는 게 아니었는데!’ 나는 그녀를 회사에서 불러냈고 그녀가 나오는 걸 보자마자 달려가 말했다.
“그렇게 고민하더니 이런 결정을 내린 거예요?”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사람들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나를 인도했다.
“내가 당신들을 만나고 있는 걸 파악하고 박실장이 저를 협박했어요. 창피할 거리는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입 닥치고 있으면 데뷔시켜 주겠다고 그랬어요.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요? 저 같은 애는 아무도 모르게 없애 버릴 수도 있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냥 박실장말대로 하겠다는 거예요?”
“정말 무서워요. 모르겠어요. 저도. 언니의 억울함이고 뭐고 내가 죽게 생겼는데…. 흑….”
“설마 이미 박실장이 예지씨도 그런곳에 데려갔어요?”
그녀는 울먹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김예지는 이미 박실장의 또 다른 피해자였다. 이걸 눈앞에 목격하다니…. 나는 앞에 있는 아무거나 발로 차 버리고 싶었으나 어금니만 꽉 물뿐이었다.
“일기장은요?”
“아직…제가 가지고 있어요.”
“다행이네요. 이대로는 안돼요! 여기서 포기하면 안돼요.”
내가 숨을 몰아 쉬며 말했다. 나는 그녀 앞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갑자기 번뜩이는 묘안이 떠올라 손가락을 딸깍했다.
“아직 방법이 있어요. 예지님이 도와줘야 돼요.”
“어떻게요…?”
“데뷔하는 날을 이용해 봐요. 오기자님이 소개해준 분이 있어요.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는 음향 엔지니어 형님이 계신데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어요.”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평생 박실장한테 휘둘리면서 살 건지. 예지님의 인생을 살 건지 결정하세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말해줘요.”
“쇼케이스에서 우리의 자료를 폭로해요. 오기자님이 기사를 내고 영상이 유포되면 예지님을 도와줄 여론이 생길 거예요. 그런 여론은 회사에서도 제어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기본적으로 분노가 가득한 사람들은 씹기 바쁘니까.”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종종 그녀는 불확실한 태도의 문자를 보내오곤 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정의 실현과 굴복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기획사내 분위기는 데뷔를 앞둔 보이 그룹 팀과 불미스러운 사건들 사이에서 긴장감이 돌았다. 김예지가 속한 팀원 중 한 명이 자살 시도 한 일은 소연 씨의 죽음에 이어 큰 충격으로 다가왔었나 보다. ‘스폰서’ 소문과 함께 연습생들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움직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했다. 몇몇은 다른 소속사로 이동하거나 그렇지 못한 연습생들은 아예 그만두는 친구들도 있었다.
게다가 폭로했을 때에 본인이 받을 위험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김예지에게 지금 여기서 끊어내지 않으면 데뷔 후 연예인으로서 잘 나가도 스폰서 이야기는 꼬리표처럼 붙어 다닐 것이며 그게 평생 큰 고통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했다. 그녀가 쇼케이스에서 할 일들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모든 것이 그녀의 선택에 달렸다.
“우리도 같이 가자 그 쇼케이스.”
핸드폰으로 김예지 사진을 보고 있는 도진이에게 말했다. 나는 그녀가 어떤 결정을 할지 궁금했다.
“어이구 순진한 놈. 그거 엄청 일찍 가서 기다려야 되고 기다려도 사람 많으면 다 못 들어가. 준호랑 기태는 학교 째고 이미 출발했을걸.”
“나 들어갈 수 있어. 아는 사람 있거든.”
“진짜? 근데 너 아이돌에 관심 있었어? 다연이는 이제 식었어?”
“다연이도 같이 가자.”
“야야. 다연이는 끼지 말자.”
“걔도 같이 가야 돼.”
“아잉 싫어. 여자애들은 질투하느라 분위기 깬단 말이야.”
나는 팔로 도진이의 목을 두르고 그의 머리를 손으로 흩었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가?”
“그런 게 있어.”
나의 의미심장한 말에 도진이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이유야 어쨌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에 신이 났다. 그는 교실 한 바퀴를 돌면서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 더러는 관심을 보였지만 더러는 예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눈치다. 그럴 때면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보여주며 그녀의 프로필을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