띠리리리링!
매몰차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떠 보니 방 안이다. 간밤에 굉장한 꿈을 꾸었다. 한 편의 영화처럼 긴박하고 강렬하고 치열했는지 일어나서도 가슴이 뛰었다. 나는 꿈을 기억하려고 애썼지만 기억하려고 할 수록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나는 서둘러 씻고는 학교로 나섰다. 어제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몇 주전 삼촌이 사준 가방을 이리저리 보았다. 어디 더럽혀진 곳은 없는지 가방을 들고 돌려가며 체크했다. 평소 물건을 잘 다루지 못하는 편이지만 이건 등에 모시고 다닌다. 학교 가는 길목에서 비슷한 시간에 늘 도진이를 만난다. 도진이는 내가 관심 없는 것들에 대해서 줄줄이 이야기하는 편이라 나는 장단만 맞춰 준다. 이야기의 주제는 주로 다른 반 어떤 애가 우리 반 어떤 애랑 사귄다더라 같은 것이었다. 도진이의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교실에 도착한다. 학교는 늘 같은 풍경을 가지고 있다.
1교시 시작 되기 전 떠드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선생님이 어떤 여학생과 들어왔다.
“오늘 전학생이 왔다. 이름은 이다연. 미국에서 살다 왔지?”
옆에 서있는 여자 아이는 긴 생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는 짧게 인사했다. 너무 예쁘다.
“안녕 잘 지내보자.”
미국에서 온 아이라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그녀는 마침 비어있는 내 옆 자리에 앉았다. 나는 무심하려고 애썼지만 온통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반한 것 같다. 멀뚱히 쳐다볼 때는 넋을 놓다가 그녀가 나를 보는 것 같으면 재빨리 시선을 책으로 던진다.
“지우개 있어?”그녀가 묻는다.
“어 연필?”나는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다.
“아니. 지우개.”
나는 숨이 턱턱 막히고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서 도무지 지우개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거기 있잖아. 네 책 위에.”그녀가 귀여운 검지 손가락으로 내 책상 위에 책 위에 지우개를 가리켰다.
“아. 아. 어. 여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무엇이든 그녀에게 말하려고 하면 바보 멍청이가 된다.
그녀는 인기가 많았다. 여신 같은 미모도 미모지만 모두에게 상냥하고 친절했다. 하물며 나에게도. 내가 그녀에게 말을 거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항상 누군가와 함께 있었는데 그걸 비집고 들어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학교가 끝나자 나는 무리와 함께 걸어 나갔다. 내가 운동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걸어갈 때 즈음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송재윤!”
최승학이다. 우리 학교 일진. 키는 나보다 한 참 작지만 아우라는 남다르다. 그가 나의 이름을 친히 부른다고?
“어, 응?”
“가방 어디서 났냐. 못 보던 건데.”
“어? 이거?”
“나 내일 다연이 만나러 가는데 가방 좀 빌려 주라.”
“어?”
그가 나에게 말 거는 일은 없다. 그런데 갑자기 부탁까지.
“어 그 나이키 가방. 짭퉁이야?”
“차… 짭퉁 아니야. 이거 삼촌이 미국에서…”
“잠깐 빌려줘 다시 돌려줄게.”
“어. 어. 그래.”
그렇게 우리는 운동장 한가운데서 서서 각자의 가방을 내려놓았다. 나는 가방 속에 있는 물품을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런 행동이 이상하다고 느낀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100% 나의 의지였다.
“야!” 대찬 여자 애의 목소리, 다름 아닌 이다연이었다. 다연이는 긴 생머리를 날리며 힘차게 걸어왔다.
“어. 다연아. 왔어? 우리 어디 갈까?”한껏 부드러워진 최승학의 목소리. 그런데 난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를 만나는 건 좀 별로다.
“너 지금 뭐 해? 그거 재윤이 가방 아니야?”
다연이가 내 이름을 안다고? 입꼬리가 쑥 올라가려는 걸 참는다.
“어 얘가 나한테 빌려준다고 그래서.”
내가 언제? 나는 이제야 이 상황이 뭔가 올바르지 않음을 인식했다. 나는 승학이 등뒤에 서서 다연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너 가방이나 빌리고 다니는 애였어?”
“응? 나? 아니 얘가 빌려 준다고…”
“빌려준다고 지금 받는 거야? 싫으면 그럼 다시 돌려줘.”
“어 싫은 건 딱히 아닌데. 참나. 야 당연하지. 내가 이런 거 뭐가 필요하다고.”
승학이가 다시 내 가방을 어깨에서 풀더니 나한테 내민다. 나는 얼떨결에 꺼내 놓았던 책꾸러미를 들고 먼지를 털었다. 그리고 다시 내 나이키 가방에 넣었다.
“괜찮아?”
다연이는 갑자기 나의 가방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더니 상냥하게 물었다. 물론 너무 괜찮았는데 무슨 일이라도 당한 아이처럼 대해주니 그저 응석 부리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까지 들렸다.
“어. 어. 그럼 괜찮지.”목소리는 삑사리가 났고 창피해져서 헛기침을 하다 웃었다. 이런.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먼지를 털어 주었다.
나는 너무 가까이 있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민망함에 가방을 휙 돌려 메려는데 가방이 그녀의 머리를 쳤다.
“아악.”
“어 미안미안미안.”
“하하하하 괜찮아.”
최승학이 재빨리 다연이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그녀는 그의 두 손을 뿌리치고 긴 생머리를 흔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빛이 났고 나도 모르게 내 손은 머리카락을 향했다. 물론 내 허리춤에서 멈췄지만.
“너 아직도 안 갔어?”그녀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내며 승학이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