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그녀가 행복한 표정으로 재현을 바라보자 재현이 테니스 공을 이어받듯 연이어 설명했다. 그는 그녀와 우연찮게 여러 번의 만남이 이어졌고 또 우연히 같은 취미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래아씨가 먼저 자기에게 반해 말을 걸어왔다고 했다. 자기에게 ‘먼저 반했다’는 말을 했을 때 재현은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레아 씨는 별다른 저항 없이 수줍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보통은 주도권 싸움에서 이기겠다고 ‘먼저’ 반했다는 말은 안 하는 것이 연애의 국룰 아닌가.
그런데 ‘먼저 반했다고?’ 얼굴도 반반한 젊은 여자가… 우리 재현이는 그녀보다 열 살이 더 많았다. 이해가 당장 가지 않으면 어쩌겠냐마는. 그러나 저러나 재현이가 마음문을 열어 누군가와 사랑을 했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앞으로 래아씨의 이런저런 단점이 좀 보여도 (글쎄 내 눈에 단점은 아무 의미 없잖아.) 눈 딱 감아 주기로, 우리 재현이랑 결혼해 줄 것에 대해 다행으로 생각했다.
띵동! 또다시 벨이 울렸다.
“누구야? 올 사람이 또 있어?” 나는 엄마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물었지만 엄마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으응, 진성이.”
재현이의 오랜 친구다. 너무 붙어 다녀서 진성이랑 결혼하는 줄 알았다는 그 친구. 근데 여길 왜? 현관으로 마중 나가려는데 엄마가 나의 팔짱을 끼고 부엌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귓속말이라지만 거실에 있는 래아씨도 들릴 만큼 큰 속삭임으로 말했다.
“내가 불렀어.”
“엄마가 왜?”
“재현이 거시기함 봐달라고 우리가 보믄 뭐 아나? 그때처럼 또…” 엄마가 말끝을 흐리자 나는 괜히 언성을 높였다.
“언제부터 진성이를 그렇게 의지 했대?”
“진성이 그놈 아가 사람 볼 줄 알잖여.”
그 사이 쳐들어온 진성이는 늘 그랬던 것처럼 높은 목소리로 우리에게 인사했다. 우리 식구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밝은 에너지의 소유자이다. 그는 미우나 고우나 늘 재현이의 단짝 친구처럼 붙어 다녔다. 명절이 되면 재현이가 없어도 엄마 집을 찾아와 점심 한 상 얻어먹고 가곤 했다.
“아이고! 이모! 오랜만이야! 제수씨! 드디어 이곳에서 보는 겁니까!”
능청맞게 반말하며 애교 떠는 진성이가 우리 엄만 좋으신 가보다. 재현이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넉살이다.
“누나, 잘 지냈어?”
“뭐 똑같지. 넌?”
내 인사말을 듣기도 전에 거실로 향한 진성이는 이미 재현이와 이야기 중이다. 저노무 새끼.
“이름이…?”
“김래아예요.”
“네?”
진성이가 노골적으로 놀란 표정을 짓자 래아 뒤에서 재현이 재빨리 넘어가라는 손 사인을 보냈다.
“아.. 래아씨! 전 최진성입니다. 하하하하하.”
“제 이름에 뭐.. 문제라도 있나요? 다들 놀라시네요. 하하”
“저.. 아는 사람이랑 이름이 같아 서요. 하하.”
“흔하지 않은 이름인데 그것도 인연이네요.”
“하하하하 어이 레아이신가요? 아이 래아이신가요?”
“아이 ‘ㅐ’ 예요.”
“아 제가 아는 레아는 레아, 어이 레아 예요.”
“하하하하.”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변한 진성은 급경색이 온 대화에 기름칠을 칠하듯 유유히 좋은 분위기로 만들어냈다.
왁자지껄한 사이에도 재현이의 팔을 잡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래아씨를 보니 마음이 절로 따뜻해졌다. 재현이… 정말 결혼하는 건가. 어색한 ‘하하하’가 계속되자 엄마가 저녁 먹자고 우리를 불러냈다.
엄마가 하루 종일 준비한 음식들이 있는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을 먹었다. 래아 씨는 마치 다른 나라에 온 듯 엄마집을 두리번거렸다. 벽에 걸린 시계며, 액자며, 커튼등을 구경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엄마가 걸어 놓은 커튼의 색깔이 좀 촌스럽다, 시계도 너무 오래됐다 등의 생각이 들자 잠시 창피해졌는데 눈앞에 파리를 쫓아내듯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떨쳐냈다. 그녀는 의자 하나 빼는 것에도 신중히 했고 앉아서 숟가락을 드는 것도 조심스러워했다. 나의 우려와 다르게 그녀는 재현이의 모든 것을 좋게 봐주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고 예뻐 보였는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진성이는 아니나 다를까 래아씨를 보자마자 백만 가지의 질문을 퍼부었다. 재현이가 왜 좋냐는 둥, 형제는 어떻게 되냐는 둥, 어디 대학을 나왔냐는 둥, 오지랖을 펼쳐 가며 엄마나 내가 하지 못하는 민망한 질문까지 밉지 않게 물어 댔다. 그녀는 진성이의 저돌적인 관심이 싫지 않은 듯해 보였다.
“그나저나, 래아씨. 캬… 래아 씨는 정말 능력자예요.”
“네?”
진성이가 거하게 한 잔 마신 사람처럼 진솔한 대화를 시도했다. 물론 식탁 위에 술 한 잔 없었다.
“얘. 비혼주의자였어요.”
“야!”
나긋하게 저지하는 재현이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뭐 비밀도 아닌데 그게 어때서! ‘예민하게 굴기는.’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비혼 주의자요?”
해맑게 물어보는 래아씨의 목소리를 듣자 재현이는 몰래 먹을 것 훔치다 걸린 사람처럼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진성에게 짧은 한숨과 함께 포기하는 눈빛을 내 보였다. 아니 경고의 눈빛인가. 그 어디쯤이다. ‘죽을래..?’라고 말하는 것처럼 조금 화가 나 보였다. 물론 옆자리에 앉아있는 래아씨는 그런 기류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아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그 정도로 주변에 래아씨만한 여자가 없었다 이거죠.”
“네.. 하하하하.”
진성이 능청맞게 맞받아쳤다. 래아씨는 활짝 웃어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래아씨는 우리의 주목이 싫지 않은 듯 보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국 한술을 뜨는 것에 열중할 동안 재현이는 진성이에게만 보일 정도로 작은 수신호를 보냈다. 놀고들 있네.
“저놈 아가 여자한테 토오옹 관심이 읎어서 내가 을마나 걱정을 혔는지 몰러요. 래아씨가 이쁜께 우리 아가 그냥 넘어가부렀나봐.”
엄마는 '비혼주의자'라는 단어가 나오자 알레르기 반응을 하듯 어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어색한 듯 즐거운 식사시간이 끝난 후 나는 ‘이제 느그들끼리 있어라’는 엄마의 조언에 따라 그들을 훌훌 내 보냈다.
재현이와 래아씨가 떠난 후 나와 엄마, 진성이는 소파에 널브러져 아무 말 없이 한 동안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저녁 식사였다고 서로 칭찬이 오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래아래? 걔는 뭐 래아 아니면 안 되는 뭐 그런 거 있대?”
진성이가 포문을 열었다. 우리 모두 10년 동안 재현이를 눈치 보게 만든 그 사건의 주인공 말이다.
“누나는 모르지?”
“뭘.”
“걔 왜 헤어졌는지?”
“돈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재현이 그때는 집도 없고 돈도 없었잖아.”
“뭐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