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 전 일이다. 아직 찬 기운이 남아 있는 차분한 공기에 봄바람이 불었던 수요일 아침, 재현이는 교양 수업을 위해 서둘러 강의실로 향했다. 그날따라 캠퍼스의 풍경이 새로워 길을 여러 번 잃었다. 그는 걸음을 재촉하는 와중에도 군대 이후 오랜만에 찾은 캠퍼스를 쓱 둘러보았다.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 건물을 둘러 심어진 벚꽃 나무의 꽃봉오리들은 더 많은 햇살을 기대하며 만개를 준비했다.
군대 제대 후 재현이 대학에 다시 돌아오기로 했을 땐 큰 결심이 필요했다. 그에게 대학은 사치였다. 성공의 가도를 달리다가 기울어져 가는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집안 사정을 모르는 척할 수 없어 그는 돈 버는 일에 눈을 돌려야 했다. 대학을 포기하겠다고 하자 부모님은 극구 그를 말렸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때문에 개인이 희생당해야 된다는 논리를 펴는 구시대적 늙은이들은 아니었다.
좋은 대학에 어렵게 들어갔으니 졸업은 해야 한다며 그를 다그쳤다. 하지만 부모님의 고통을 보고 있기 힘들었던 그는 낮에는 틈나는 대로 공부를 했고 저녁에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돈을 벌었다. 통장에 돈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텅텅 비어갔다.
누나의 결혼식과 엄마의 허리 수술로 돈의 지출은 더 커져갔다. 웅장하고 화사했던 단독 주택을 뒤로하고 이사의 이사를 거쳐 네 식구가 살기에도 비좁은 아파트로 거취를 옮겨 왔다. 집안의 모양은 점점 더 수척해져 갔다. 그 와중에 누나는 소박한 결혼을 원하니 집안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없는 집안에서 시집보내는 티를 최대한 내고 싶지 않았는지 재현이는 아득바득 돈을 모아 누나에게 500만 원을 쥐어 주었다.
부모님 자존심까지 챙겨주는 바보같이 착한 재현이었다.
그런 누나는 벅찬 가슴을 쓸어내리며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나는 내 인생 살 것이고 우리 가족 모두 각자의 인생을 살 것이니 너는 구원자 콤플렉스를 버려라’며 고마운 마음과는 달리 잔소리를 해대자 그는 ‘누나의 자존심이 곧 나의 자존심’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며 도리어 화를 냈다.
누구도 잘못한 것 없는, 신경전만 오간 동생과의 말다툼 후 누나는 병상에 계시는 엄마를 바라보며 서러운 눈물을 쏟아냈었다.
그 해, 강도 높은 알바와 공부의 부담으로 교우 관계는커녕 동아리나 다른 여가 활동을 한다는 것은 재현에게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는 캠퍼스에 싱그럽게 자리 잡은 코랄 빛 봄과는 상관없어 보였다.
공부할 시간도 없어 따라가기도 벅찬데 지각이었다. 본인에게 자책할 겨를도 없이 뛰고 또 뛰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무리 뒤에서 잠시 고민하다 계단을 두세 개씩 건너뛰어 5층까지 올라갔다. 복도를 지나 오른쪽 코너를 돌았을 때 드디어 저 멀리 503호의 강의실이 보였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천천히 숨을 고르며 뒷문으로 갔다. 미닫이 문을 살짝 밀어내려고 문에 손을 올렸는데 그보다 더 허둥지둥 달려온 듯한 여자가 재현을 밀쳐 내며 망설임 없이 문을 주르륵 밀쳐냈다. 아주 큰 소음과 함께.
강의실 안에 있던 학생들이 문 여는 소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하나 둘 교수님 강의에 다시 집중했다. 재현은 넘어질 뻔한 몸을 바로 세우고 미안한 기색으로 강의실에 들어갔다. 그는 중간 어디쯤에 자리를 잡았고 마침 ‘허둥지둥’ 그녀도 왼쪽 대각선 앞 방향으로 자리 잡았다. 재현은 무례한 그녀의 행동에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뒤통수를 얼마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책을 피었다. 오른손으로 펜을 돌리며 교수님으로 시선을 던졌는데 교수님이 창가 쪽으로 서서히 움직이시면서 설명하시는 덕분에 그녀의 뒤통수가 또 눈에 걸렸다. 그녀로 치면 오른쪽 귀에 긴 생머리를 걸고 있었고 그녀의 귀에는 반짝거리는 귀걸이가 세 개나 박혀 있었다.
봄에 핀 꽃가루 때문인지 반짝거림 때문인지 재현의 눈이 깜박거렸고 깜박임 끝에 그의 시선은 자석이라도 붙인 것처럼 그녀의 뒤통수 그리고 반짝 거리는 귀걸이에 또 꽂혀 있었다.
지각도 지각이지만 그 반짝반짝한 귀걸이에 정신이 팔려서 평상시처럼 교수님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저걸 세 개나 아프겠다 저 귀...'
"자 오늘은 여기까지."
교수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학생들은 의자를 밀어내는 무자비한 마찰음을 내며 짐을 챙겼다. 일어나는 학생들의 어수선한 소리 때문에 정신이 들었는지 재현이도 책을 가방에 넣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재현아!”
“…..?”
“너도 이 수업 듣네?”
“어 진성아.”
진성이가 재현의 어깨를 두르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진성이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였다. 이 녀석이 대학까지 따라올 줄은 몰랐다고 ‘진상’ 스토커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앞 뒤로 있는 비좁은 두 개의 문이 병목현상을 만드는 덕분인지 학생들이 어수선하게 서서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현은 강의실 안을 재빨리 스캔해 보았다. 하지만 그 ‘허둥지둥’ 녀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빨리도 나갔네.’
진성이 재현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튀기자 그제야 진성이 계속 말을 걸고 있었음을 눈치챘다.
“어, 뭐라고?”
“나랑 같이 동아리 하자.”
“시간 없어.”
“이거 너의 인생 커리에도 도움이 되는 거야. 경영대학 동아리거든.”
“… 물리적으로 시간이 없다.”
드디어 강의실을 빠져나온 재현과 진성은 조금 더 발걸음에 속도를 내었다. 재현이 다음 수업을 들으러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딱히 할 일 없던 진성은 재현과 함께 걸었다. 그는 재현의 발걸음을 쫓아 가느라 종종걸음을 걸었으며 입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내 부탁 한 번만 들어줘. 친구한테 너 온다고 다 말해 놨단 말이야.”
“누구 마음대로 그런 결정을.”
“애들이 너 오기만을 기다린다고.”
“뭔 소리야. 날 왜 기다려?”
“과외야 미루면 되고, 새벽엔 용역이라 안 가면 그만이잖아? 내가 너 알바 가는 거 하루치 일당 준다!”
재현이 갑자기 멈춰 서는 바람에 진성이 가던 발걸음을 돌려세웠다. 재현이 저 멀리 어딘 가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뜻밖의 제안에 기가 찬 표정이 가득한 얼굴, 그러니까 화난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진성은 그런 재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재현이 ‘저 철없는 재벌집 아들은 누군가의 하루 벌이가 이렇게 쉬운 것일까’라고 잠시 삶의 부조리에 한탄할 뻔하다가…
“콜!”
이라고 재현이 외쳤다.
진성은 제자리에서 널뛰었다. 돈 준다는데 재현에게 자존심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사실 요즘 같아선 하루라도 단 잠을 자고 싶었던 것이 그의 작은 소망이었다.
“하.. 이 자식. 심장 떨리게 하기는. 밀당 좀 하네! 고마워 내일 봐, 여기야. 아까 그 건물 302호. BGS.”
그는 가방에서 동아리 소개가 담긴 팸플릿을 꺼내 재현에게 건네주었다.
“BGS?”
“베타 감마 시스타! 경영대학교 동아리.”
진성은 그렇게 외치고는 남자치고 발랄하게 (아마도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 긴 파마 머리카락 때문일 것이다.) 뛰어갔다.
그날도 재현은 일을 하느라 밤늦게까지 밖에 있었지만 그렇게 피곤하지 않았다. 당장 내일 쉴 생각이었는지 주말을 앞둔 기분이었으리라. 그렇게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재현은 집에서 티브이만 보시는 아버지의 뒤통수에 대고 짧게 인사한 후 방으로 들어갔다. 새벽 한 시다. 머리가 베개에 닿자마자 잠이 드는 스타일이지만 오늘따라 이리저리 뒤척이고 나서야 스르르 눈을 감았다.
똑똑똑!
“… 누구….”
쾅쾅쾅!
재현의 방문을 그렇게 두드릴 사람은 이 집에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 생각에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일어났다. 쾅쾅쾅! 쾅쾅! 시끄러운 소리가 이상하게 계속되자 그는 아직 잠에서 덜 깬 몸을 일으켜 신경질적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재혀어어언!”
진성이 유쾌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종이 트레이에 담은 아이스커피 세 잔을 재현 얼굴 앞에 들어 보였다.
“뭐야 이 아침부터.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동아리 가야지.”
“뭐? 벌… 써?”
“그럼, 우리 늦었어. 네가 사랑에 빠진 귀걸이 세 개 단 여자애가 밖에서 널 기다리고 있다고.”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