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있잖아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에다 가녀린 몸 치고 밀치는 힘이 좀 센 그 여자 애. 허둥지둥 녀”
“뭐? 뭐야? 허둥…. 지..”
“너한테 한눈에 반했다고 나한테 물어보더니… 너를 굳이 만나겠다고… 이 아침부터 참나.”
“….?”
“오른쪽엔 귀걸이가 세 개 왼쪽엔 귀걸이가 두 개 양손엔 반지가 여러 개. 청바지에 티셔츠. 그 애!”
“뭐야 이 새끼. 그런 걸 어떻게…. 커피는 왜 세 잔이지…?”
“정신 차려. 커피나 마시고.”
진성이가 얼음이 가득 담긴 커피를 건네주다 떨어뜨리자 차가운 커피가 발등에 쏟아지며 얼음이 여기저기 튀었다.
‘앗 차거!’
눈이 번쩍였다.
‘그러고 보니 눈앞엔 허연 천장이고 여긴 어디지?’
커피를 떨어뜨린 진성이는 온데간데없고 침대 끝에 서서 엄마가 분무기로 재현의 발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허둥지둥녀는…. ‘아.. 꿈이었네.’ 늦은 시간까지 일어나지 않는 재현이 걱정되었던지 엄마는 분무기로 물을 칙칙 뿌리며 그를 깨우고 있었다.
그를 만나겠다고 온 그녀는, 보고 싶다고 아침부터 ‘나를 찾아온 그녀는…’ 꿈에 불과했다. 비록 꿈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침 공기에 설레어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가 이내 스스로를 향한 조롱의 미소로 변했다.
“빨리 일어나, 느 알바 갈 시간 아니여?” 엄마의 분무질은 계속 됐다.
“어? 어… 그만해 엄마.”
딩디리리리리링
허둥지둥녀 따위는 없으니까 제발 정신 좀 차리라는 듯 휴대폰은 벨 소리가 진동소리와 함께 세차게 울려 댔다. 진성이다. 그제야 진성이가 동아리 가자고 닦달한 꿈속 이야기가 선명해졌다. 아, 그래. 동아리 약속! 하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꽉 잠긴 재현의 목소리가 다소 성의 없어 보였는지 진성이는 괜히 초조해졌다. 재현이가 동아리 약속을 잊고 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느낀 진성이가 행여라도 재현이가 약속을 펑크 낼 까봐 집 앞까지 차로 데려오겠다고 열심을 부렸다.
재현이는 물론 그런 진성의 제안이 싫지 않았고 무엇 보다 몸이 쉴 수 있어서 마음이 가벼웠다. 그는 삐쭉 솟은 머리카락에 손가락 빗질을 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준비라면 5분 만에 도 끝낼 수 있었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화장실에만 붙어 있는 거울을 보러 들락날락거렸다.
새삼 들여다보는 거울 앞에서 모처럼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러다 그는 ‘웬 치장이냐’며 준비를 서둘렀다. 진성의 빗발치는 전화벨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그가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법 비싼 차가 타이어 마찰음을 내며 재현 앞에 섰다.
“늦었어 빨리 가자.”
창문이 내려진 차 안에서 진성이 말했다. 어떤 여자라도 그런 표정을 보면 반할 것 같았다. 재현이 진성의 차에 타자마자 그는 경주 자동차라도 모는 듯 뒷바퀴에 연기를 내며 출발했다. 차 안에는 심장을 울릴 만큼 강한 비트의 힙합 음악이 흘러나왔고 거기에 맞추어 진성은 마치 흘러나오는 모든 비트를 턱으로 끌어당기겠다는 강한 의지라도 있듯 고개를 까닥거렸다. 핸들 위에 있는 손가락은 피아노를 두드리듯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 손가락의 모습이 그렇게 고급스러워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발레리나가 무대 위에서 도는 스핀처럼 우아해 보였다. 재현은 무릎 위에 걸쳐 놓은 자신의 손가락을 훔쳐보고 그 비트에 조금 흔들어 보이다 말았다.
진성에게는 비싼 냄새가 났다. 분명 향수 정도를 뿌린 것 같긴 했는데 재현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늘 그의 향기를 ‘비싼 냄새’라고 했다. 그때 그는 진성의 외모와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남자가 봐도 세련됐다고 느꼈다. 운전 실력 또한 좋았다.
그는 과속을 했고 아주 보기 좋게 차 사이를 빠져나갔다. 너무 빠른 속도로 앞에 있는 차로 다가가면 재현은 무심결에 차문 위에 있는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 차는 앞에 있는 차 뒤꽁무니에 코 앞까지 가서는 한 대 칠 듯하다가 앙큼하게 옆 차선으로 바꿨다. 재현은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사고가 날까 봐 마음을 졸였다가 보기 좋게 옆 차를 추월할 때는 짜릿함을 느꼈다.
학교 가는 길은 진성이만의 레이스였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운전 실력을 뽐내고 있을 때 재현의 마음은 한편으로 유린당했다. 선망과 질투가 동시에 일어났다. 그가 가진 것과 본인의 처지가 하늘과 땅처럼 멀어 보였다. 하지만 이 정도 가지고 좌절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고 재현은 스스로 일러두었다. 게다가 진성은 자기가 하는 짓이 상대방에게 위화감을 주는 것이라는 것도 스스로 깨닫지 못했으리라.
재현은 은밀하게 진성의 단점을 꼬집어 내려 애썼다. 쟤는 ‘나보다 인라인을 못 타지.’라고 속으로 말하자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