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볼 수 있다면

by 봄남

‘쥐비에스 여러분 저희 서울 지구 전체 모임이 다음 주 6월 20일 수요일 저녁 7시에 있을 예정입니다. 장소는 강남에 있는 A 빌딩 13층이고 연회장(가)입니다. 비즈니스 분야의 학문적 성취를 존경하고, 격려하며, 구성원들 간의 교류를 통해 경영학에 대한 이해와 연구를 더욱 발전하기 위한 연회 모임으로 저희 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다른 대학 학생들도 참여할 것이며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될 예정이니 한 분도 빠짐없이 참석하셔서 저희 학교의 위상을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동아리에서 주최하는 꽤 큰 행사였다. 연회 모임이라… 경영학에 대한 이해와 연구라기보다 인맥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일 것 같아 보였다. 어떤 학생들은 학점 보다 이런 모임을 더 중요시했다. 문제는 날짜였다. 그는 주중에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가만 보니 수요일 저녁이면 과외하는 시간이었다. 하루 미뤄 보는 것이 어떨까, 그냥 일이나 할까… 고민 중에 진성에게 전화가 왔다.


“재현아.”

“어.”

“동아리에서 온 문자 봤지? 이거 정말 중요한 모임이야. 무조건 가서 얼굴도장 찍어야 해. 거기에 유명한 사업가들도 많이 와. 일부러 후배들과 연대 맺으러 온다는 소리가 있어. 작년엔 우리 학교 선배 중에 게임 회사 낸 김학도도 왔다니까. 이번 연도는 지역을 확대했으니까 더 대단한 사람이 올 거 같아! 누가 올지 기대된다고!”


진성의 목소리는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 동아리 모임 중에 꽤나 중요한 모임 같았다. ‘그렇다면 레아도 오겠구나’라는 생각이 번뜩 들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며칠 사이 진성은 주하와 저녁을 몇 차례 함께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알고 보니 주하도 그동안 진성을 좋아했었더라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아직 사귀는 단계는 아니라고 했다. ‘응?’ 어쨌든 전보다 더 친밀해졌고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져 매일이 신난다고 했다. 진성이는 자신이 이렇게 사랑에 빠진 여자는 주하가 처음이라고 했다. 재현은 진성이 미국 갈 준비를 하고 있는 주하의 평온한 호수 같은 마음에 괜한 돌을 던진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그래. 그럼 행사 때 만나. 레아도 오겠지?”

“당연하지. 걔가 이 행사 주최자 중에 한 명 일걸! 요새 그것 때문에 바빠서 우리한테 연락도 안 하잖아.”

“오 그래?”


재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다음 주면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더 열심히 일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수요일 저녁, 과외를 취소하고 열심히 강남역으로 향했다. 강남역 밖을 나오자 볼륨감 있는 거대한 건물들이 줄을 서서 그를 맞이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무관심 속에 발걸음을 서둘렀다. 더러는 명품 옷으로 치장한 남성들의 껄렁거림, 머리를 휘날리며 자신 있게 걸어가는 여성들 때문에 괜히 압도당했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입고 있는 옷, 메고 있던 가방 그리고 왠지 소극적인 걸음걸이, 두리번거리는 행동 하나하나가 초라해 보인다고 생각하자 그는 시선을 자꾸만 땅으로 떨궈냈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 말해두고 있었던 찰나.


뛰뛰!


재현이 걸어가고 있는 뒷모습을 본 진성이 클랙슨을 울렸다. 재현은 진성을 알아보고는 재빨리 그의 차에 올라탔다. 때마침 진성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진성은 머리카락에 왁스를 바른 듯 단정해 보였고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다. 진성이 재현의 모습을 스캔하더니 왁스를 건네주었다.


머리에 바르라고 했다. 재현이 거울을 보며 스타일링을 하자 아까와는 전혀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연회장에 가기 전 신데렐라의 스타일링을 바꿔주는 할머니 요정이라도 된 듯 그의 얼굴을 보고 진성은 뿌듯해했다.


“완전 깡패네, 얼굴 깡패 쳇.”


재현은 진성의 칭찬에 한껏 입꼬리를 올렸다. 그들이 A빌딩을 찾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성은 역시나 한 방에 주차를 했고 둘은 슬로 모션의 느낌으로 멋지게 내렸다. 주차장에서부터 이미 GBS연회를 위한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더욱 그랬다. 멋지게 차려입은 남성들이 구둣발 소리를 내며 우르르 쾅쾅 탔기 때문에 진성과 재현은 코너 뒷자리에 밀려났다.


남성들은 역시나 연회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손님이 크리스문이라는 것도 엿들을 수 있었다. 진성은 크리스문의 이름이 들리자 팔꿈치로 재현을 옆구리를 툭 치며 과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마도 엄청난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으리라. 재현은 크리스문이 누군지 몰랐다. 그저 레아를 오랜만에 볼 수 있다는 사실만 중요할 뿐이었다. 재현이 별 반응을 안 보이자 진성이 귓속말로 “BD soft, BD soft.”라고 했다.


재현은 그제야 동그랗게 입을 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BD 소프트는 투자 회사였다. IT 전문 VC로 단 시간에 엄청난 부와 명예를 이룬 회사이다. 대표의 이름이 크리스문이었다. 크리스 문은 앞을 내다보는 안목과 과감하고 공격적인 투자로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띵!


엘리베이터의 도착음이 열리자 검정 양복 신사들이 모두 내린 후 진성과 재현도 내렸다. 복도 끝으로 보이는 거대한 양문이 오늘의 연회 장소였다. 두꺼운 나무 무늬 문이 천천히 열리자 따뜻한 주백색의 조명이 그들을 반겨 주었다. 연회장 안에는 거대한 크리스털이 빽빽하게 달려 있는 샹들리에가 높은 천장에 달려 있고 바닥에는 짙은 와인색의 카펫이 그리고 검은색 식탁보를 두른 동그란 테이블이 패턴을 맞춰 놓여 있었다.


“재현아! 진성아!”


아름다운 노래 같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레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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