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쁘다...

by 봄남

재현이 보지 않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을까. 레아의 아름다움은 빛을 발했다. 그곳에서 레아는 독보적으로 아름다웠다. 적어도 재현의 눈에는 말이다.


“왔네! 재현이 머리 모양이 달라졌네. 멋있다! 이마를 드러내니 잘생긴 얼굴이 더 잘 보이잖아.”

“어.. 어.”


가슴이 두근거리자 머릿속이 하얘지고 말을 길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웬일인지 눈을 자꾸 피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진성은 주하를 찾는 듯 고개를 기웃거렸다.


“주하는 오고 있는 중 이래.”


레아가 경쾌하게 말했다. 진성과 주하에 대해서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레아는 재현에게 윙크를 했다.

‘그런 거… 하지 마.’ 재현은 왠지 모를 환희와 동시에 절망감을 느꼈다.


재현, 진성, 레아가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자 연회는 기다렸다는 듯이 시작됐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미안한 표정으로 몸을 숙이고 들어온 주하가 진성의 옆에 앉았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앞서 초대자의 인사말이 시작되었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핀 조명으로 몸을 드러낸 인물은 아니나 다를까 크리스 문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큰 소리로 환호했다. 크리스 문은 그들과 같은 대학, 같은 과 출신이었으며 미국에서 석박사를 마친 후 다시 한국에 들어와 호기롭게 회사를 차렸다고 소개했다.


훤칠한 외모에 작은 키, 29세의 젊은 나이로 성공한 인플루 어서였다. 그는 요즘 세대에게 초미의 관심을 받고 있다. 그가 한 말이나 행동이 밈으로 돌아다닐 정도였다. 한참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으니 무서울 것이 없어 보였다. 자신만만한 그의 표정은 가히 매력적이었다.


길지 않은 개회식이 끝나고 자유롭게 대화하는 시간이 되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담소를 나누는 시간인데 어느덧 팬미팅 장소처럼 변질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한 번이라도 더 크리스문과 대화하려고 안달이 나있었다. 진성과 재현은 멀리 지켜 서서 사람들의 본색을 드러낸 야망을 구경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옆에 앉은 레아에게 갑자기 크리스문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재현은 크리스문과 레아를 번갈아 가며 지켜보았다. 맞았다.


그는 레아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레아 씨?”

“네. 안녕하세요.”

“고마워요. 이 행사 여느라 고생이 많으셨죠. 저한테 컨텍하신 분 맞으시죠?”

“네. 별말씀을요. 기쁘게 준비했습니다.”

“하하… 굉장히 미인이시네요. 목소리만 그런 줄 알았더니.”

“아... 감사합니다. 하하.”


레아가 볼이 발그레해져서 웃었다. 크리스문은 여자와도 능청스럽게 대화를 잘했다. 물론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재현과 진성이 멀뚱히 서 있자 레아가 자신의 친구들이라며 크리스문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들은 얼떨결에 크리스문과 인사 했다. 뭐라도 말을 해야 될 것 같았는데 그들은 입이 언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 또 봐요.”


크리스문이 누구라도 반할 것 같은 자신감 있는 윙크를 레아에게 하고 재현에게는 격려의 뜻이 담긴 손으로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재현은 크리스문이 만진 어깨를 기분 나쁘게 털어 내며 레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또 봐요… 라니!”


레아가 양손을 두 볼에 얹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재현은 얼떨떨했다. 행복해 보이는 레아의 양 어깨를 붙잡고 정신 차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꾹 참아냈다.


“왜 또 봐?”


재현은 손가락을 입에 물고 불안정한 발음과 음색으로 말했다. 불쑥 나온 그의 말에 레아는 머쓱해졌다. 재현은 그런 자신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그는 골똘히 적당히 말랑한 손톱을 잘근잘근 씹어내고 있었다.


“그러게? 나도 모르지.”


레아의 목소리에서 아양을 느꼈다. 이런 제길. 재현은 솟구쳐 오르는 분노와 함께 이제는 위태롭게 달려 있는 가운데 손가락 손톱을 무자비하게 씹어서 뚝 끊어냈다. 때마침 잠시 자리를 떴던 진성이 와주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했다. 더 이상 어떤 이야기도 이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레아는 너무 아름다웠고 크리스 문은 그에게 너무 큰 벽이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저렇게 유명한 분이 고작 레아 따위에게 따로 보자고, 밥을 사고, 급기야 사귀기까지 하진 않겠지. 레아보다 예쁘고 섹시한 여자들은 강남에 수두룩 빽뺵이라고.’ 그는 혼자서 되뇌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진성은 재현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레아에게 장난스럽게 물었다.


“야, 얘 왜 이러냐.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어디 벌써 술이라도 마신 거야?”


레아는 재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성의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고 크리스문이 자기와 또 보자고 했다며 연신 자랑질을 해댔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 재현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크리스문의 포스터가 보였고 여기저기서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자 약지 손가락의 손톱도 깨물기 시작했다. 불현듯 그는 괜히 토라졌다.


그냥 집에나 가야겠다고 일어났는데 그는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크리스문이 한 손으로 레아의 허리를 감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얼음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보같이 눈꺼풀만 몇 번 깜박거릴 뿐이었다. 진성은 멀리서 얼음기둥이 된 재현과 재현이 바라보고 있는 레아, 그녀와 다정하게 서 있는 크리스문을 번갈아 보았다.


“뭘 그렇게 봐요?”

“어, 주하야.”


진성은 옆으로 다가온 주하에게 몸을 돌렸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나오지 않은 주하는 두 눈이 유난히 더 커 보였다. 주하는 두 잔의 와인 잔을 들고 있었고 한 잔을 진성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녀는 와인을 천천히 마시며 할 말이 있는 듯 진성을 응시했다.


“나. 이번 주말에 미국가요.”

“언제 돌아와?”

“일단 한 달 후.”

“그리고….?”

“다시 갈지 말지는… 이후에 결정하게 될 것 같아요.”


이야기의 흐름과는 다르게 주하는 진성에게 고백을 듣고 싶었다. 그건 욕심이었다. 고백을 들어서 사귄다고 그녀의 미국행이 바뀐다거나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듯 그녀의 마음은 그를 향한 들끓는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요동쳤다. 정신 나간 결정을 할지도 몰랐다. 주하는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어느새 진성의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다가가 있었다. 진성과 몇 번의 데이트를 통해 주하는 그가 배려심이 있고 따뜻한 남자라는 것을 알았다. 진성은 생각보다 착하고 세심했다. 그녀는 특히 그의 목소리 울림이 좋았다. 그의 목소리는 커피 잔도, 식탁도 바닥도 진동시키는 것 같았다. 그가 말하기라도 하면 마치 온 세상이 진성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주하는 그런 그의 목소리로 ‘미국에 가서 살지 말고 다시 돌아와. 나랑 사귀자.’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그러면 주하는 한국에 기꺼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주하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진성은 알리 없었다. 진성은 주하에게 어떤 제안도 할 수 없었다. 주하 앞에 펼쳐진 밝은 미래에 본인의 욕심으로 괜한 먹물을 튀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잘….. 다녀…”


진성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어둡게 조명이 바뀌고 음악이 나오며 다음 순서가 진행 됐다. 진성의 음성은 천장에 매달린 대형 스피커에서 쳐들어 오는 음파에 사무쳤고 그의 입모양만 가늠될 뿐이었다.


“너….ㄴ…. 쁘다…”


그는 뭐라고 외쳤지만 주하는 잘 들을 수가 없었다. 둘은 동시에 스태프들이 어수선하게 움직이는 텅 빈 무대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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