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하고 씁쓸한 방학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재현과 진성의 마음에 커다란 구멍만 남긴 연회장 이후 그들은 별다른 만남을 가지지 않았다. 재현은 크리스문이 자신을 격려하듯 올린 손만 생각하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격려로 느껴지지 않았다. 수치스러웠다. 레아 앞에서.
그런 사기꾼 같은 놈에게 반한 레아만 생각하면 한 없이 마음이 토라졌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너도 별반 다름없구나’라며 그녀를 폄하하고 싶은 유혹이 간절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는 그에게 긴 생머리 사이로 세 개의 귀걸이가 반짝이는 귀를 가진 엘프 같은 존재였다.
‘맹수들 싸움에서 진 수사자는 멀리서 암사자를 그저 바라볼 뿐이겠지.’ 처절하고 냉철한 동물의 세계처럼 시작도 못한 그 연분의 끝은 냉혹하고 잔인했다. 좌절의 기분이 그를 지배하려고 하면 그는 더 열심히 뛰며 배달하고 목이 쉬어라 과외를 했으며 카페 일을 도왔다. 그날도 그녀를 잊기 위한 발악으로 최선을 다해 일만 했다. 생각은 멈췄고 몸은 움직였다.
그리고 늦은 시각 집에 들어가면 절망이 증폭되었다. 힘없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를 반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관심도 아니었고 무관심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티브이를 켜 놓고 소파에 앉아 계셨고 그는 아버지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인사할 뿐이었다. 티브이 옆에 선풍기는 한 밤 중에도 찌는 더위를 식혀 주기 위해 열심히 돌고 있었다. 빈 소주병이 소파 앞 작은 테이블 위에서 힘없이 나뒹굴고 있었고 시원하지 않은 바람에 얇디얇은 아버지의 머리카락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너무 싸돌아 다니지 말아라. 밤늦게까지 아무리 사내라도. 몸도 생각해야지.”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는 찰나 아버지의 묵직한 잔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본능적으로 그를 화나게 했다. 재현은 문고리를 꼭 쥐고 나직하지만 매섭게 대꾸했다.
“벌어야죠. 돈.”
티브이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웃음소리가 눈치 없이 그들의 대화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불쌍한 아버지의 뒷모습에 연민을 느낄 뻔했던 그는 아버지의 잔소리에 차라리 환호했다. 아버지의 공격은 아버지를 실컷 미워하고 싶은 구실거리를 주었다. 그런 그의 감정을 읽어 내기라도 하듯 아버지는 시동을 거셨다. 아버지는 아들을 볼 면목이 없는 건지 뒤돌아보지 않으시고는 대뜸 소리를 지르셨다.
“쥐꼬리만큼 버는 그런 돈 필요 없다!! 넌 공부나 해라.”
“…. 언제부터 관심 가지셨다고. 제가 돈 버느라 늦게 오는 것도 모르셨으면서!”
“그러니까 그 쓸데없이! 돈 벌지 말고 취업 준비나 하고! 공부나 해.”
일만 하느라 바빴던 아버지는 평상시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없었는데 사업이 기울어지시면서 가족에게 더 매몰차게 대하셨다. 웬일인지 아들에게는 더욱 그랬다. 그럴 때면 아버지가 없는 편이 더 나았을 뻔했다고 윽박지르며 반항하기도 했다. 재현의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당장 집 안에 있는 가구 몇 개는 박살 낼 수도 있겠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대신 이를 악 물었다.
“아이고! 재현아 들어왔니? 안 자고 뭐 한다요. 여보.”
시끄러운 소리에 어머니가 놀라서 나오셨다. 어머니는 재현의 등을 잡고 방으로 밀어내며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셨다.
“저놈 저거, 늦게 오지 말라고 해!”
방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아버지는 큰 소리로 억지를 부리셨다. 이렇게 일단락되면 차라리 나았다. 재현은 이까짓 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는데 갑자기 온갖 서러움이 몰려왔다. 그는 새우 몸을 하며 웅크렸고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눈물을 소리 없이 흘렸다. 레아는 여전히 좋았고 집안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일은 누구보다 열심히 끝도 없이 하지만 빚 갚는 일엔 소용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