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려하지 마

by 봄남

개강을 일주일을 앞둔 팔월 중순.


레아와 진성의 주도 하에 속초의 여행 코스가 다 정해졌다. 재현은 일을 빼기가 쉽지가 않았지만 그래도 여름 방학인데 여행 한 번쯤은 다녀와야 되지 않겠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1박 2일에다 레아도 같이 가는 여행이라 신경이 단단히 쓰였다.


재현, 진성, 레아, 주하 그리고 크리스문이 함께 하는 여행이었다. 크리스문이 같이 가는 것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그가 실질적 물주 이므로 재현은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낼 순 없었다. 크리스문은 이번 여행을 위해 수영장이 딸린 빌라를 하나 잡아 주고 초특급 요리사도 초청했다고 했다. 바닷가를 가는데 수영장이 대수냐며 재현은 볼멘소리를 했지만 나머지들은 환호하는 것 같았다.


출발지는 학교 앞이었다. 레아와 주하는 경쟁이라도 하듯 잔뜩 꾸며서 입고 나왔고 1박 2일 여행치고 많은 짐들을 들고 왔다. 하얀색 원피스에 커다란 챙이 달린 라탄 모자를 쓴 레아는 긴 생머리를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 꼭 여신 같았다. 재현은 한 번 더 그녀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그런 그녀의 부지런한 멋 부림이 싫지 않았다. 미국에서 막 도착한 주하도 핑크색 선글라스와 회색 티셔츠에 청바지를 경쾌하게 입었다. 크리스문의 차와 진성이의 차, 이렇게 두 대의 차가 속초로 향했다. 진성이의 차에는 주하와 재현이가, 크리스문의 차에는 레아가 탔다. 속초로 가는 내내 재현이는 레아가 크리스문과 같은 차로 오는 것에 배알이 뒤틀렸지만 이상하게 전투력이 상승했다.


‘크리스문 따위.’


어디서 나온 순진한 자신감이었을까. 레아를 향한 그의 짝사랑은 산도 바다도 막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이 숙소에 도착했을 때 재현은 잠깐 주눅 들 뻔했다. 크리스문이 준비한 빌라는 상상 초월이었다. 현실뿐만 아니라 드라마 어느 곳에도 이렇게 세련되고 현대식의 인테리어를 해 놓은 빌라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빌라는 바닷가로 바로 나갈 수 있도록 해변과 맞닿아 있었다. 레아와 주하는 방을 구경하며 연신 행복한 탄성을 질렀다. 아니 비명에 더 가까웠다. 모두가 즐기는 와중에 재현의 표정은 굳어갔다. ‘내가 꼭 성공하고 말리라.’라고 야무진 다짐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야 왜 그래? 아파?”

“머… 멀미를 했나…”


진성이 주먹으로 복부를 가격하는 장난을 치자 재현의 표정이 풀렸다. 벌써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여자들은 높은 피치를 자랑하며 수영장에 풍덩 빠졌다. 첨벙 거리는 물소리와 여자들의 비명 소리 덕분인지 휴가 느낌이 났다. 여름의 끝자락이었지만 여전히 무더위가 기승이었다. 그들은 해변으로 뛰어들었다. 휴가철이 지나서 바닷가에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


재현은 홀로 바다 모래 위에 앉아 바닷가에 달려가 물을 튀기고 놀고 있는 레아와 친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는 레아의 모습이 천사 같았다. 한참을 앉아 있는데 눈앞으로 보이는 맥주병 때문에 고개를 들었다. 크리스문이 서 있었다. 그가 맥주병을 건네주며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왜 안 놀아요?”

“…. 글쎄요. 노는 방법을 잊어버렸어요.”

“하하하. 노인네처럼 말하시네.”

“그쪽은요?”

“나야 말로 노는 방법을 잊어버렸죠.”

“…..”

“레아가 그쪽 얘기를 많이 하던데요. 재현 씨 맞죠?”


재현은 대답 대신 저 멀리서 웃고 있는 레아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는 척을 하더니 크리스문을 보며 입을 열었다.


“둘이… 사귀나요?”


재현은 이 질문을 할 때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기 위해 헛기침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아뇨.”

“아니라고요?”


크리스문이 피식 웃으며 재현을 바라보았다. 그놈 참 귀였네 라는 표정이었다. 어른이 혼자서 막 일어나 걸음걸이를 하고 있는 어린아이를 향해 웃음 짓듯. 그런 인자하고 온화한 미소였다. 재현은 그 그윽한 눈빛을 보고 하마터면 잠시 위로받을 뻔했다.


“아직은요.”

“…..”


크리스문의 얼굴에 자신감이 묻어 있었다. 재현은 아직 사귀는 중이 아니라니 한편으로 안심이 되었지만 그에게 어떤 기발한 작전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처지와 눈앞에 보이는 크리스문이라는 벽의 괴리감이 막연한 자신감으로 채워질 수 없을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챌 뿐이었다. 크리스문은 또 재현의 등에 손을 올려 다독 거렸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 레아가 있는 바닷가로 향했다. 재현은 신경질이 났다. 듬직한 그의 뒷모습을 보고 속으로 소리쳤다.


‘격려하지 말라고! 위로하지 말라고!’


저녁이 되자 온갖 종류의 음식이 만들어져 나왔다. 초대된 셰프는 전문가답게 해산물 요리부터 스테이크까지 뚝딱 만들어 냈다. 크리스문은 레아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마주 앉은 재현은 맛있는 음식을 눈앞에 두고도 마음껏 먹을 수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었지만 예상된 맛인 것처럼 아는 척하느라 연기자가 되어야 했을뿐더러, 레아에게 음식을 입에 넣어 주기도 하고 얼굴에 묻은 것들을 띠어 내주기도 했으며 그녀의 어깨나 허리에 팔을 두르는 크리스문의 행동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졌기 때문이었다.


크리스문이 잠깐 주목 하라며 와인잔을 들고 포크로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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