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거없는 용기

by 봄남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재현이 미어캣처럼 번뜩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앞에 서 있는 그 아이는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못된 레아였다.


“레아야. 여긴 웬일이야?”

“오빠 여기서 일한다는 소식 듣고 왔어요. 오빠 보려고. 방학 동안 뭐 하고 지내 나아가 해서.”


오랜만에 듣는 발랄한 목소리에 재현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간의 섭섭함은 이미 눈 녹듯 사라진 것인가.


“그냥 일만 했지.”

‘어쩔 수 없다. 레아 앞에 서면 난 행복하다.’ 재현은 무력해지는 자신이 미웠다. “방학 다음 주면 끝나가는데 끝나기 전에 우리 놀아요.”

“내가.. 놀 시간이.. 근데 우리?”

“응.”

“우우우리?”


재현은 손가락으로 자신과 레아를 번갈아 가리키며 확인했다. 그녀는 까르르 웃으며 그럴 리가 있냐며 진성이와 미국에서 막 온 주하도 함께 한다고 했다. 재현은 떨리려던 마음을 추스르듯 웃음을 내뱉었다. 문득 그녀가 그 사이 크리스문은 만났나 궁금했다. 자신은 보고 싶지 않았냐며 장난 반 진담 반처럼 노골적인 질문을 하려다 촌스러워지는 건 또 싫어서 관두기로 했다. 레아는 무슨 일인지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재현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어느새 ‘나의 여신’으로 다시 등극한 레아는 재현의 삶의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여름인데 바닷가 가요.”

“바다? 그 사람 많은?”

“휴가철 다 지났어요. 이제 많이 없을 걸요?

“근데 그… 크리스 문은 만났어?”


결국 묻고 말았다. 무심코 물었지만 어색한 모습은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아… 크리스 문도 올 거예요!” 그녀가 약간 쑥스러워하며 그의 이름을 말했다.

“그 이후로… 다.. 다시 마.. 만난 거야?”

“네. 그분 바쁜데 친히 시간 내주셔서 밥도 사주셨어요. 이번에 바닷가 가는 아이디어도 사실… 그분이 내셨어요. 멋진 빌라 하나 빌려 주신대요. 우린 그냥 맛있는 거 먹고 놀다 오면 돼요.”


그녀는 크리스문 이야기를 망설이다 말했다. 망설이는 모습은 부끄러워서였을까, 재현을 의식해서일까 알 수 없었지만 재현은 어쨌든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는 서운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표정관리를 했다. 얼굴 근육은 왜 자기 마음대로 안되는지 심하게 떨리는 안면이 느껴질 정도였다. 레아가 그의 표정에서 심란함을 읽어 낸 것일까. 그녀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오빠?”

“어? 어.”

“가실… 꺼죠?”

“….. 어 다 간다면 가야지. 우리 크루인데.”

“고마워요. 근데 오빠.”

“응?”

“… 보고 싶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장난스럽게 경쾌했다. 진지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런 목소리는 갈피를 못 잡는 그의 마음을 더 심하게 흔들어 놓았다.


“…어.”


그녀의 얼굴이 환한 햇살로 바뀌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고 재현은 깨달았다. 보고 싶었다는 그녀의 말과 빛나는 미소 때문에 충전기를 꽂아 살아난 핸드폰처럼 원초적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는 그날 막연히 다짐했다. 레아와 사귀겠다고. 레아는 자신의 여자여야만 한다고. 그 원초적 힘은 그깟 크리스문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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