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온 여름의 기억
제목에 여름이 있어서 어쩐지 읽고 싶었던 책입니다. 읽는 내내 저에게 두고 온 여름은 무엇일지도 생각해 보게 되더라고요. 이 책으로 성해나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네요.
이 책은 기하와 재하의 시선을 따라가는 차례로 구성되었어요.
기하
사진사였던 아버지는 여름마다 내 사진을 찍어 사진관 쇼윈도에 걸어두었다.
그건 아버지에겐 일종의 연례행사와 같아 나는 한 해도 빠짐없이 카메라 앞에 서야 했다.
도복을 입고 품새를 선보이는 사진이나 커튼 머리에 브릿지를 넣은 촌스러운 사진, 돌잡이 사진.
나의 성장기가 그곳에 다 전시되어 있었다.
p.8
기하는 아버지와 큰 변화가 없이 무던한 나날을 보내왔습니다.
아버지는 무던하고 고집스러웠고 늘 다른 이들보다 한발씩 늦었다.
기하 아버지는 흐름에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묵묵히 살아오던 분이었는데 기하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 재혼을 하게 됩니다.
기하는 '어머니'라는 호칭이 입에 잘 붙지 않아서 '저기' 혹은 '그쪽'이라는 애매한 말로 새어머니를 부릅니다.그래서인지 가깝게 느껴지지 못했는데 그에 반해 새어머니의 아들 재하는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며 잘 따랐습니다. 재하는 분위기를 잘 띄우며 밝았고 그런 모습이 기하에게는 애쓰는 것처럼 보였어요. 재하는 아토피를 심하게 앓았는데 어머니랑 살면서 여태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아서 뒤늦게 큰 병원을 다니게 됩니다. 재하의 보호자로 함께 병원을 다니게 된 기하는 병원 치료가 끝나면 함께 중국냉면을 사 먹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자신의 땅콩소스를 재하에게 덜어주었는데 재하는 크게 웃어 보이며 무언가를 감추는 것 같았습니다.
형. 토마토는 과일이게, 채소게.
몰라.
식물학적으로는 과일인데 법적으로는 채소래. 웃기지?
p.26
재하의 치료는 진전이 보이지 않았고 어느 날에 가족 모두가 재하가 치료받는 병원을 따라갑니다.
재하는 항상 혼자 치료를 받았는데 이날 처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진료를 받습니다. 그 사이 밖에서 새어머니와 남은 기하는 어색해합니다. 진료실을 나와서 네 명은 바람을 쐬러 가는데 아버지가 출사지로 혼자 다니셨던 인릉이었습니다. 그때는 여름이었습니다.
이듬해 대학에 입학하고 기하는 기숙사에 들어간 뒤 본가에 잘 가지 않게 됩니다. 그 후 시간이 흘러서 인릉에서 찍었던 사진을 발견한 기하는 오래 들여다보다가 깊숙이 그것을 숨겨둡니다.
재하
나의 새아버지. 그와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열 살이었습니다.
p.48.
재하의 친아버지는 구치소와 교도소를 번질나게 드나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친아버지와 다르게 새아버지는 다정했습니다. 대중목욕탕, 가족사진 등 안정감과 소속감, 친근감을 느끼게 해 줬습니다. 어머니와 새아버지가 조촐히 상견례로 결혼식을 대신했던 날, 재하는 기하를 따라서 밖에 나옵니다. 형이 듣고 있던 노래를 이어폰으로 같이 나눠서 들었지만 여덟 살 나이 차이만큼 거리감이 있었습니다. 기하에게 잘하려고 노력하던 어머니에게 매번 무뚝뚝하던 형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기하의 학교 기숙사에 아버지 어머니 재하가 찾아간 날, 모질게 대하는 기하 때문에 결국 어머니는 울었습니다.
어떤 울음이 안에 있던 것을 죄다 게워내고 쏟아낸다면, 어떤 울음은 그저 희석일 뿐이라는 것을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비워내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농도를 묽게 만들 뿐이라는 것을요.
p.74
재하가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친아버지가 찾아옵니다. 그때부터 기하 아버지는 가족들 몰래 재하 친아버지에게 돈을 뜯겼고 나중에는 칼에 찔리기까지 합니다. 새아버지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그 사건은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흔을 남겼습니다. 그렇게 4년 동안 가족이었다가 헤어지게 됩니다. 재하와 어머니는 다시 둘이 살게 되었고 어떤 날, 이전 사진첩을 보며 셋이서 함께 했던 소풍 같은 날을 기억해 봅니다.
사진 속에서 새아버지는 저와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부드럽게 미소 지은 채 손을 맞잡은 세 사람을 보고 있으면 우리가 버티지 못하고 놓아버린 것들, 가중한 책임을 이기지 못해 도망쳐버린 것들은 다 지워지고, 그 자리에 꿈결같이 묘연한 한여름의 오후만이 남습니다. 이편에서 왔다가 저편으로 홀연히 사라지는 것들.
어딘가 숨어 있다 불현듯 나타나 기어이 마음을 헤집어 놓는 것들.
p.88
사진첩을 덥습니다. 옷장 깊숙이 그것을 감추려다 원래 놓여있던 자리에 그대로 올려둡니다.
언젠가 또 우리는 그것을 펼치겠지요.
우리 삶에서 가장 돌아가고 싶은 한순간을 그리면서요.
잘 지내시냐, 건강하시냐,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이들에게 닿지 못할 안부 인사를 보내며 말입니다.
p.89
여기까지가 기하와 재하의 과거를 추억한 이야기였습니다.
형제였던 두 사람의 여름 기억, 두고 온 여름이지요.
기하
오랜 시간이 지나서 기하는 재하 모자를 우연히 발견하게 됩니다.
재하 모자를 우연히 발견한 건 서른일곱 살이 되던 해, 여름이었다.
p.92
기하는 다니던 회사를 나와서 건축 사무소를 개업했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았고 이혼에 대리운전을 하며 생활합니다. 그러던 중 습관처럼 보던 스트리트 뷰 속에서 재하 모자를 보게 됩니다. 재하 반점. 식장의 간판을 보고 주소를 메모지에 옮겨 적습니다.
재하 반점을 찾아간 기하는 흰머리가 제법 생겼고 아직 서른도 안 되었을 재하를 상상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갑니다.
오랜만이다.
자기를 보고 놀라는 재하에게 스트리트 뷰를 보고 찾아왔다며 기하는 예전과 다르게 호들갑을 떨며 말합니다.
신기하네요.
지금의 형편을 보여주기 싫어서 예전 회사의 명함을 내미는 기하에게 재하는 자기는 드릴 게 없다고 합니다. 피곤해 보이는 재하는 더 이상 어린 재하가 아니었습니다. 기하는 재하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으며 말을 건네봅니다. 어머니 안부를 묻자 재하는 돌아가셨다며 연락드릴 경황이 없었고 연락처도 몰랐다고 합니다.
곧이어 아버지는 잘 지내냐는 재하에게 기하는 요양원에 계신다고 전합니다.
기하가 재하의 식당을 찾아간 날이 식당을 정리하는 날이어서 어수선해진 가운데 둘은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기하를 마중하던 중 재하가 먼저 "인릉 안 갈래요?" 물어봅니다. 찾아간 인릉에서 한 어르신에게 형제냐는 질문을 받게 되는데 둘은 아무 말도 못 합니다. 식당을 정리하고 일본 고베로 떠난다고 재하가 말하자 자신도 모르게 기하는 조언을 하다가 재하의 대답에 마음이 상합니다.
'다 저 걱정해서 하는 소리인데.'
한적한 인릉에서 둘은 적당히 대화를 이어갑니다.
같이 찍을래요?
역광이 심해 누가 그애고, 누가 나인지 구분조차 어려웠다. 잘못 찍은 사진이었지만 누구도 다시 찍자고는 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재하는 한참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빛 아래 우리는 두 점 그림자 같았다.
p.129
재하에게 해주어야 했을 말들을 뒤늦게나마 중얼대보았다.
잘 지냈지, 보고 싶었어. 잘 지냈으면 좋겠다, 미안해 같은 평범하고도 어려운 말들.
이제 와 전송하기에는 늦어버린, 무용한 말들을.
p.131
둘은 다시 만났고 또 헤어집니다.
재하
고베에서 보내는 재하는 한국에서보다 잘 지냅니다. 그리고 누가 받을지 모를 편지를 씁니다.
누가 이 편지를 받을까요.
재하야, 다정히 부르며 이마를 쓸어주는 아버지일까요.
희고 따뜻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가에 서서 해바라기를 하는 어머니일까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다가 가만히 미소 짓는 형일까요.
누구든 그곳에서는 더 이상 슬프지 않기를 바라며 오오누키 씨에게 편지를 건넸습니다.
미처 못다 한 말이 봉해진 편지를요.
p. 143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이야기입니다.
누군가의 한때 기억 속 여름을 몰래 읽은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나의 여름의 기억 중에서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날이 있지 않을까 찾고 싶기도 했습니다. 두고 왔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이야기를 통해서 삶의 조각들을 이어나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기대한 것처럼 여름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소설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인 이야기가 여름을 통해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내용이 무겁지 않아서 좋았고 마치 드라마 한 편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지나고 보니 가장 좋았던 시간이었음을 아련하게 느끼게 되는 소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