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들의 모국어』, 글맛과 음식의 즐거움

진중한 소설가에게서 발견한 맛깔스러운 글맛

by 봄여름




무심코 고른 책이었는데, 책장을 넘기다 깜짝 놀랐다. 내가 아는 바로 그분, 소설 ‘레몬‘과 ‘아직 멀었다는 말’로 진중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권여선 작가님의 책이었다. 제목은 '술꾼들의 모국어'. 술 이야기가 가득할 줄 알았지만, 의외로 술보다 음식이 중심이었다. 소설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위트가 곳곳에서 묻어났고, 음식에 관한 묘사는 얼마나 맛깔스러운지 읽는 내내 군침이 돌았다.



책 ' 술꾼들의 모국어'


책을 읽기 전부터 설레게 한 건 목차였다. ‘라일락과 순대’, ‘땡초의 계절’ 같은 제목만으로도 이미 흥미가 차올랐다. 글과 제목을 찰떡같이 이어 붙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읽는 동안 그 센스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제목이 호기심을 자극했다면, 막힘없이 술술 이어지는 글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덕분에 책장을 넘기며 여러 번 웃음을 터뜨렸다.



라일락 꽃이 필 때면 나는 순댓국이 먹고 싶다. 우리 동네에도 순댓국을 아주 잘하는 집이 있다. 이 집도 역시 순대의 부재로 순댓국의 진가를 발휘하는 집인데, 나는 가끔 혼자 가서 순댓국을 시켜 먹곤 한다. 들깨가 듬뿍 든 순댓국에 새우젓을 넣어 간을 맞추고 돼지 귀, 오소리감투, 애기보 등을 먼저 건져 먹는다. 시원하고 달달한 깍두기에 갓 무쳐낸 배추 겉절이가 입맛을 돋운다. 매운 땡초를 된장에 찍어 먹고 뽀얀 순댓국 국물을 훌훌 떠먹으면 뇌수가 타는 듯한 쾌감이 샘솟는다. 거기에 소주 한 병을 곁들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다만 내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혼자 순댓국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먹는 나이 든 여자를 향해 쏟아지는 다종 다기한 시선들이다. 내가 혼자 와인 바에서 샐러드에 와인을 마신다면 받지 않아도 좋을 그 시선들이 주로 순댓국집 단골인 늙은 남자들의 것이다. 때로는 호기심에서, 때로는 괘씸함에서 그들은 나를 흘끔거린다. 자기들은 해도 되지만 여자들이 하면 뭔가 수상쩍다는 그 불평등의 시선은 어쩌면 '여자들이 이 맛과 이 재미를 알면 큰일인데'하는 귀여운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게 메롱이라도 한 기분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요절도 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반세기 가깝게 입맛을 키우고 넓혀온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니까.
P.25-26



어려서 약골에 심한 편식으로 돼지고기는 아예 입에도 못 대던 작가. 국물만 맛봐도 소고기인지 닭고기인지 구별할 만큼 예민했던 미각이 성인이 되면서 변해가는 과정은 꽤 인상적이었다. 순대조차 먹지 못하던 그가 어느 순간 순대를 받아들이고, 나중에는 순댓국까지 즐기게 된다. 순댓국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작가가 드디어 그 매력을 늘어놓을 때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 먹던 음식을 먹게 되는 건 정말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순간이니까.


그때 문득 얼마 전 본 최화정 님의 유튜브 영상이 떠올랐다.

"인생에 큰 기쁨이 없다. 그런데 김치를 먹잖아? 그냥 길에서 50억짜리 로또를 주운 거랑 똑같아."

김치를 못 먹는 스태프를 안타까워하며 한 말이었는데, 순댓국의 참맛을 알아버린 작가의 이야기와 완벽하게 통하는 말이었다.



최화정 유튜브



내가 언제부터 물 냉면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최소한 마흔은 넘어서였을 것이다. 음식점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나서 후식으로 나온 옆 사람의 물냉면 한 젓가락 덜어 먹어보았는데 의외로 맛이 괜찮았다. 며칠 뒤에 뜬금없이 그 냉면 맛이 떠올랐고 그게 먹고 싶어 며칠 동안 어쩔 줄을 몰랐다. 결국 그 음식점에 가서 물냉면을 시켜 먹었는데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묘한 맛이 나서 놀랐다. 알고 보니 그 음식점은 물냉면 잘하기로 유명한 집이었다. 이제 나는 물냉면이라면 환장하는 사람이 되었고, '해장에는 냉면'이라는 오래전 선배의 말을 백번 이해하게 되었고, 물냉면 전문집에서 비빔냉면을 시키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워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비틀게 되었다.
P.82



땡초에 조금씩 독이 오르는 속도로,그렇게 살벌하게 매력적인 걸음으로 여름은 내게 온다.
P.97



여름은 내게는 한때는 땀과 벌레의 계절이었고, 한때는 불면과 실연의 계절이었지만, 사실은 언제나 땡초의 계절이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계절을, 그 여름의 열기를, 그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맺혀 있는 땡초를 끝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매운 음식에 대한 나의 광적인 애호에 대해서 나는 이보다 더 나은 이유를 찾지 못했다.
P.103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집밥은 소박하지만 맛깔난 손맛이 담긴 밥상을 의미한다. 집밥이란 말을 들으면 누구나 향수에 젖은 표정을 짓고 입속에 고인 침을 조용히 삼키는데, 이건 순전히 집밥을 하지는 않고 먹고만 싶어 하는 사람들의 환상이 아닐까 싶다. “오늘 뭐 먹지?”라는 잔잔한 기대가 “오늘 뭐 해 먹지?”로 바뀌는 순간 무거운 의무가 된다. 집에서 해 먹는 게 집밥이라면, 집집마다 그 집 부엌칼을 쥔 사람이 다른데 어떻게 그게 죄다 소박하면서 맛깔날 수 있단 말인가. 집밥이 무조건 맛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옳지는 않다.
P.183



비빔냉면만 즐겨 먹던 작가님이 물냉면의 매력에 빠졌다는 대목에서 나는 묘한 공감을 느꼈다. 나 역시 반대로 물냉면만 고집하다가 비빔냉면의 세계를 새롭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계절에 맞는 음식 이야기와 그에 얽힌 에피소드들은 자꾸만 페이지를 넘기게 만들었다. ‘술과 음식’이 아니라 ‘술과 안주’라고 불러야 한다는 작가님의 말처럼, 음식에 대한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태도는 절로 감탄을 자아냈다.


갓 지은 밥에서 번지는 윤기와 단맛처럼, 이 책의 문장들도 하나하나 깊은 맛을 전했다. 읽다 보면 책에 나온 음식을 모두 맛보고 싶어진다. 무엇보다 평범한 일상이 작가님의 눈을 거치면 특별한 글이 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책을 덮고 나니, 나도 사소한 순간들 속에 숨어 있는 글감을 더 세심히 바라보고 싶어졌다.






책 '술꾼들의 모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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