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에도 모양이 있다, 독서 후 남은 여운
도서관에서 책장을 바라보다 보면 이상하게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다. 그날은 『슬픔의 모양』이 그랬다. 제목만 보고선 온통 무거운 이야기일 거라 짐작했지만, 막상 책장을 열자마자 덜컥한 순간을 지나고 나니 의외로 차분히 읽혔다.
마음이 깊이 가라앉아 있을 때는 오히려 또 다른 이야기가 위로가 될 때도 있다. 반대로 무난하게 살아가는 시기에는 일부러 어두운 감정을 들여다보는 게 버겁다. 누군가의 아픔을 마주하는 순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제목은 묘하게 담담했다. ‘슬픔에도 모양이 있을까?’라는 물음은 내 손을 책 속으로 이끌었다.
내 생각에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아버지가 있다.
밖에선 깍쟁이 소리를 듣더라도 자기 가족들에게만은 잘하는 아버지와
자기 식구들은 챙기지 않으면서 밖에 나가서 남들에게만 잘하는 아버지.
불행히도 우리 형제들은 후자에 당첨되었다.
책 '슬픔의 모양'
나는 지금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이 집 바깥에서의 모습과 집 안에서의 모습이 어쩜 그리 다를 수 있는지를. 바깥세상에서는 어떤 일도 척척 해결하며 가족들에게 구세주처럼 여겨지던 아버지는, 집 안에서는 작은 휴지 조각 하나를 손에 쥐고선 그걸 어디에 버려야 하는지를 몰라 쩔쩔매는 모습으로 내게 충격을 주셨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은퇴 후 이십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달라지기는커녕 적어도 공감과 이해 그리고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아버지는 아예 집안 내에서 홀로 섬과 같은 존재가 되어갔다. P.21
작가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분이었다. 밖에서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시지만, 가정에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런 분. 대한민국의 60~70대 아버지들에게 흔히 보이는 모습이다. (물론 우리 아빠는 그러지 않으셔서 예외지만.)
그러다 어느 날, 아버지는 코로나와 독감 예방주사를 동시에 맞고 쓰러지신다. “내 몸은 내가 안다”며 고집을 부린 끝에 찾아온 위기였다. 이후 병원 생활과 가족 간의 갈등, 환자를 돌보는 과정에서의 수많은 사건들이 이어진다. 그 이야기는 집안에 환자가 있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깊이를 담고 있었다.
작가로서 나는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다고 늘 말해왔다. 하나는 내가 주고 싶은 걸 주는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상대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걸 주려는 마음이라고. P.80
이 대목에서 오래 멈춰 읽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주고받는 것들이 과연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고집과 자기만족은 아니었는지 곱씹게 된다.
슬펐다.
너무 슬퍼서
누가 슬픔이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보면
설명이라도 할 수 있을 만큼. P.125
일반 병동, 음압실, 중환자실을 거쳐 요양병원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너무도 구체적이었다. 가족에게 무심했던 아버지가 기가 다 빠진 모습으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순간, 작가의 마음은 복잡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단 번도 해본 적 없는 다정한 방식으로
가족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P.131
그날, 남의 집 애사에 찾아가서 실로 엉뚱한 대목, 그러니까 온갖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이 화환마다 늘어진 흰 리본 위에 줄줄이 써 있는 광경에 압도된 나는, 그날따라 유난히 그 액수가 초라해 뵈는 돈 십만 원을 봉투에 넣어 조의금으로 내고 나오면서 문득 상상을 해봤다. 만약, 내가 지금 당장 '그 일'을 치르게 된다면 과연 내 앞으로 놓일 근조 화환의 개수는 몇 개나 될까. 그나마도 음악은 그만두었으니 음반사에서는 뭐가 올 일이 없고, 현재 관계하는 출판사 한두 곳에다 내가 먼저 전화해서 내 입으로 저…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 화환 하나만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하며 직접 요청을 하는 구차함을 견뎌야만이 겨우 하나두 개가 올까 말까 할 것이다.
그놈의 근조 화화 좀 남 보기에 초라하지 않을 만큼 받으려고 나름대로 애쓰면서 아등바등으로 살았는데… 하지만 세상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던가? 비단 장례식만이 아니라 살면서 어떤 일이든 준비가 완벽히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일이 닥치는 경우가 언제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난 언제나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일 때, 내가 좀 더 잘 나가고 좀 더 성숙하고 하여튼 지금보다는 훨씬 더 준비가 되었을 때 무슨 일이든 벌어지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나는 결코 내가 원하는 수준의 사람이 되어본 적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결국 그런 처지를 견디고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란 것일 테니까.
P.142-143
이 문장들을 읽을 때, 나도 아빠의 장례식을 그려볼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느꼈던 무력감이 떠올랐다. 슬픔뿐 아니라 감당해야 하는 일이 몰려드는 그 상황을, 나 역시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내 집 현관 앞에서부터 베란다 직접 거실 끝까지 십여 미터 되는 거리를 하염없이 왕복하면서, 정말로 일이 잘못되면 누구에게 연락을 하고 누굴 부르지 말아야 할지 헤아리는 일을 반복했는데, 이상하게 인연이 사소한 사람이라도 불러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내 집 내밀한 집안 행사에 부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이 떠올랐다. 그래서 부를 사람들을 추리고 추리다 영 완벽하게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원치 않는 사람까지 내 부모 장례 치르는 데 찾아와 내 마음이 불편해질 거라면, 차라리 아예 아무도 부르지 않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P.145
왜 전에는 그토록 열렬히 중요했던 것들이 지금은 하나도 중요하지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그럼 그때 나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 그리 집착을 했던 것인가, 아니면 그때는 그때대로 중요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게 된 것뿐인가.
P.149
나는 지쳐있었다. 부모가 쓰러지고,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살아서 가족들을 들볶고, 그에 화내고, 이해할 수 없어 힘들어하고, 그러다 보면 또 미안해지고, 불쌍해하다 다가가면 또 신경이 곤두설 만큼 예민해지고, 그렇게 아픈 부모를 돌보고 살피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그 모든 일들에. 나는 그 짧은 통화를 위해 나름대로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을 아버지가 가여워서 잠시지만 가슴을 부여잡고 울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지친 마음을 비우고 재충전할 길이, 그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깟 전화 한 통쯤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적어도 이 상황이 끝나지 않는 한은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이 길어지면서 우리가 아버지한테뿐만 아니라, 우리끼리도 예민해져서 끝내 서로를 할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P.223
이 부분은 책을 읽으며 가장 크게 울컥했던 대목이다. 병간호는 단순히 ‘효도’의 문제가 아니다. 지쳐가는 자신과 가족들, 무너져가는 일상과 마음을 다 껴안아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게 가족이란 늘 행복한 지옥이거나
지옥 같은 천국 둘 중 하나였다.
내가 아는 한 한 번도 중간은 없었다.
p.228
그렇게 병원에 입원한 엄마를 보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어느 날 밤, 나는 나이 쉰네 살에도 여전히 매일 밤 쓰는 일기장을 펼치곤 펜을 들어 이렇게 적어 넣었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어제도 보고 내일도 볼 엄마가.
p.251
아버지의 병세가 조금씩 나아지자 이번엔 어머니가 아프고, 결국 수술대에 오르신다. 그 시기를 묵묵히 기록한 글은 지나치게 감정적이지 않아서 더 마음에 남았다. 다행히 부모님 모두 회복해 집으로 돌아오신다는 결말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처음 이야기가 시작될 때 꼭 비극으로 끝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부럽기도 했다. 나도 아빠가가 완쾌되어 지금 곁에 계셨다면, 우리는 어떤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을까 상상해 보게 되었으니까.
다 읽은 책을 덮고 나서, 한 가족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함께 경험한 듯한 기분이 남았다. 『슬픔의 모양』은 개인의 기록을 넘어, 가족이라는 존재와 그 안에서의 역할을 되묻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목이 참 잘 어울린다. 슬픔은 막연한 감정이 아니라, 각자 다른 모양으로 우리 곁에 자리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그 모양을 함께 바라보는 순간, 슬픔은 혼자가 아닌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