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오래 남는 엄마의 밥 냄새 같은 영화
다소 심심한 듯한 영화를 좋아한다. 극적인 전개는 자극적이지만, 어쩐지 요즘은 그런 긴장감이 피곤하게 느껴진다. 영화를 보는 이유가 잠시 쉬어가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되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잔잔하지만 끝에 묵직한 울림이 남는 영화라면 일단 마음이 간다. 넷플릭스에서 무엇을 볼까 무심히 리모컨을 누르다 보면 어느새 눈에 익숙해지는 포스터가 생기는데, 내게는 <논나>가 그랬다.
이탈리아어로 ‘논나’는 할머니를 뜻한다. 단순히 할머니의 일대기를 다룬 이야기일까 짐작하며 재생 버튼을 눌렀다면, 그것은 기분 좋은 반전이 된다. 그 안에는 가족과 사랑, 상실과 위로, 그리고 다시 일어설 용기가 한데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조는 어린 시절부터 먹어온 엄마와 할머니의 요리를 그리워한다. 영화는 어머니의 장례식과 함께 시작되는데, 상실감에 빠진 조는 아무런 의욕도 없고 엄마가 남긴 마지막 편지조차 차마 읽지 못한다. 주변의 진심 어린 위로도 그에게는 좀처럼 닿지 않는 듯하다. 그러다 조금씩 기운을 차린 조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요리를 선보이고, 급기야 엄마와 할머니의 레시피로 식당을 열기로 결심한다.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확신에 차 셰프 전원을 ‘할머니’들로 고용한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지인부터 새로운 인연까지, 그들이 채운 주방은 일반 음식점에서는 맛볼 수 없는 집밥 특유의 따뜻함으로 채워진다.
호기롭게 문을 열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주변 상인들의 텃세로 손님은 발길을 끊었고, 식당은 계속해서 적자만 쌓여간다. 막다른 길에 다다른 조는 유력 일간지의 음식 섹션 편집장 에드워드 듀런트를 찾아가 간절히 부탁하지만, 스케줄이 꽉 찼다는 차가운 거절만 돌아온다. 결국 조는 할머니 셰프들에게 사실대로 털어놓으며 식당을 정리하기로 뜻을 굳힌다. 그는 남은 재료를 버리는 대신 마지막 파티를 열어 지인들을 초대하기로 한다. 텅 비어 있던 식당이 사람들로 가득 찬 모습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더 씁쓸하다. 그제야 조는 엄마가 남긴 편지를 열어본다. 그 안에는 손때 묻은 레시피들이 가득했다. 더 이상 자신의 요리를 먹일 수 없는 아들에게, 그것이라도 남겨주고 싶었던 마음이었을 것이다. 조는 그 레시피를 하나씩 따라 하며, 마치 엄마가 곁에서 용기를 주는 듯한 위안을 얻는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조의 가게는 기적처럼 신문 지면을 장식하게 된다. 몰래 다녀간 평론가의 진심 어린 글 덕분에 ‘에노테카 마리아’는 순식간에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할머니들의 요리에는 가족을 먹이고 살려온 시간과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화려한 기술을 가진 셰프의 요리가 아닐지라도, ‘엄마의 맛’은 국적을 초월해 모두의 정서를 건드리는 힘이 있었나 보다. 이제 조는 생계를 위한 직장 대신 오롯이 식당에만 집중하게 된다. 꾸준히 손님이 찾는 레스토랑의 풍경으로 끝을 맺는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에서 더 뭉클하다.
맵고 짜고 강한 맛에 길들여진 시대라 할지라도, 결국 우리가 가장 그리워하는 것은 엄마의 밥상이다. 특별할 것 없는 반찬도 엄마가 해주면 맛있는 이유는 우리가 태어나 처음 맛본 사랑의 기억이 그 맛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엄마가 외할머니가 차려주신 소박한 밥상을 유독 맛있게 드시던 장면이 떠오른다. 반찬도 몇 가지 없는 국과 밥뿐이었는데도 엄마는 “외할머니 밥이 최고”라고 하셨다. 그때는 잘 이해되지 않았던 그 마음을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다. 나 역시 엄마가 해주는 음식은 내가 직접 만든 것과 다르게 느껴진다. 평소 밥 한 그릇을 다 비우는 일이 드문데도, 오랜만에 엄마 밥을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한 그릇 더!”를 외치게 된다. 그 밥상에는 따뜻한 사랑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주인공 조가 그토록 엄마의 맛을 그리워했던 건, 엄마가 없다는 것이 곧 나를 키워낸 커다란 사랑을 더는 맛볼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바깥 음식은 아무리 맛있어도 어딘가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엄마가 필요하다. 우리 엄마도 가끔 외할머니가 그립다는 말을 하신다. 영화 속 이탈리아 가정식은 우리에게 소고기뭇국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식당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워, 오히려 집 밖에서는 더 먹기 힘든 음식이다. 가끔 삶이 지칠 때면 나는 엄마의 김치찌개를 떠올린다. 참치든 돼지고기든 상관없이 푹 끓여낸 김치찌개에 갓 지은 쌀밥, 그리고 김 한 장만 있다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최고의 밥상이다.
괜히 지친 날, 무기력하게 리모컨을 돌리며 무엇을 볼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을 추천하고 싶다. 보고 나면 무언가 든든히 챙겨 먹고 싶어진다. 배가 차면 마음에도 조금씩 기운이 돌아온다. 좋은 음식처럼 사람을 든든하게 하는 영화는 오래 남는다. <논나>는 그렇게 마음의 허기를 조용히 채워주는 영화였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엄마가 해주는 밥 냄새 같은 것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좋은 영화는 때로 줄거리보다 먼저, 오래 잊고 있던 그리움을 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