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것
강아지가 나오는 소설일까. 책 표지에는 덥수룩한 털뭉치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제목을 보고 잠시 망설여지기도 했다. ‘짧고 투쟁 없는 삶’이라니, 혹시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일까 봐 읽을 자신이 없었다.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누군가는 먼저 읽은 친구에게 슬프냐고 물어보고 “전혀 아니다”라는 대답을 들은 뒤에야 겨우 책을 펼쳤다고 했다. 나 역시 그 말에 안심하고 읽기 시작했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개그우먼 정선희의 유튜브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마음이 끌렸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배우 박정민도 이 책을 추천했다고 한다. 이상하게 나는 그가 추천한 책들을 다 읽게 된다. 아마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내 선택에 기분 좋게 작용하는 모양이다.
소설은 강아지를 중심에 두면서도, 그를 둘러싼 인간들의 면면을 보여준다. 동물을 함부로 대하고 돈으로 거래하는 태도부터, 가족처럼 돌보는 애틋함까지. 죄책감과 안쓰러움 같은 감정들이 뒤섞여 있다. 책은 막힘없이 읽히면서도 문득문득 가슴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는 말처럼, 문제는 언제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후에스카르 비숑’이라는 설정은 처음에는 조금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생명에 등급을 매기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 설정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대로 드러난다. 누군가는 그놈의 품종에 집착하며 강아지를 빼앗아 가지만, 정작 중요한 건 이름표가 아니었다. 결국 남는 건 단순하다. 누가 이 존재를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조건을 따지며 소유하려는 사람과,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친 강아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 그 둘 사이의 거리는 멀고도 분명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저절로 나의 강아지 사랑이를 떠올렸다. 이유 없이 나를 반기고, 조건 없이 마음을 내어주는 존재. 나는 사랑이를 만나기 전까지 이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강아지가 아니면 알기 어려운 마음이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서도 자꾸 조건을 붙인다. 어떤 모습인지, 무엇을 가졌는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하지만 강아지는 그렇지 않다. 그저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온전한 마음을 건넨다. 그래서 이 책의 이야기가 더 크게 와닿았고, 오래 남았다.
책을 덮으며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본다. 강아지의 종이 무엇이든 그게 무슨 소용일까. 가장 중요한 것은 품종도 조건도 아니라, 그 존재 자체라는 것을 이 책은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강아지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끝내 모를 것이다.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좋은 보호자 아래서 행복한 개. 이시봉은 지금 행복한가? 나는 이시봉과 내가 지금까지 별다른 문제 없이 잘 지내왔다고 생각했다. 이시봉은 명랑했고, 나는 이시봉에게 귀를 기울였으니까. 어떤 사고가 있었고, 그 사고가 우리를 조금 특별한 관계로 만들어주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단지 내 입장이 아니었을까? 이시봉은 내가 없어도, 아니 나 없는 곳에서 더 명랑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게 아닐까?
P.110
"사랑은 예측 불가능한 일을 겪는 거야."
아빠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강아지를 사랑한다는 건 더 그래."
P.123
켄넬 문을 열어보지도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정채민 대표는 다시 그 앞에 다가가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카이와 루시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물은 줘야겠지. 그가 천천히 켄넬 문을 열자, 카이와 루시는 잠시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은 채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한 발 한 발 그의 거실로 걸어 나왔다. 그때 이미 모든 미래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채민 대표는 그렇게 말했다. 강아지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다 알 거예요. 그러면 다 끝났다는 걸.
P.159
그는 카이와 루시가 자신의 아파트에 온 처음 일주일 동안 거의 외출하지 않았다. 학교도 가지 않았고, 뱅센 동물원 쪽으로 산책하러 나가지도 않았다. 주말에 집으로 찾아온다는 친구들에게도 곤란하다는 말을 전했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들르던 단골 쌀국숫집에도 가지 않았다. 딱 한 번 아파트에서 가까운 15구에 있는 애견용품점에 들러 간식과 사료와 장난감을 샀고, 바로 옆 서점에서 『강아지가 좋아하는 모든 것』『우리 강아지 건강하게 키우는 법』같은 책을 구입했다. 그는 바로 아파트로 돌아왔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자신에게로 달려와 그 앞에서 뱅뱅 도는 카이와 루시를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건 그가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환대였다. 언제나 빈집이었는데, 그건 서울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정채민 대표는 장을 본 가방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채 그 자리에 쪼그려앉았다. 그러곤 강아지들에게 말을 건넸다. 많이 기다렸니? 아니, 나는 빨리 온다고 했는데...... 정채민 대표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계속 카이와 루시에게 사과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사과를 해보는 것도 그에겐 처음 있는 경험이었다. 그는, 그건 누군가를 사랑해보지 못했다는 말과도 같은 뜻이라고 했다.
P.160-161
침대에서 자다가 문득 발밑을 내려다보면 거기에 잠들어 있는 작은 강아지 두 마리, 그 깜짝 놀랄 만한 존재들. 그는 그 감정을 오랫동안 기억했다.
P.163
"복수가 차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애를 안고 계속 다리도 주물러주고 노래도 불러주고, 그러다가 정용이 품에서 떠났대."
나는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자꾸 이시봉이 떠올랐다. 개와 인간의 수명은 다르니까...... 별다른 일이 없으면 내가 이시봉의 마지막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생각만으로도 울적해졌다.
p.273
나는 그때까지도 계속 고통스럽게 울고 있는 이시봉에게로 달려갔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생각조차 필요 없는 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일.
p.463
그녀는 루시를 다 묻은 후, 그 옆에 작은 동백나무 하나를 심었다. 그 나무가 루시의 묘비가 되어주었다. 누군가의 묘비를 세워주는 일. 박유정은 그것이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누군가가 사람이든 동물이든, 기억하는 것이 사람의 책임이라고. 그녀는 계속 그 일을 해나갔다.
p.511
나는 나무들의 움직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거기 뭐가 있나?
이시봉이 내 얼굴을 바라보며 마치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거기 뭐가 있지.
나는 이시봉의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렇게 대답했다.
p.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