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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샘 Mar 04. 2020

싸움에 이기는 쌈박한 기술

김민식, <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 푸른숲, 2020


"2012년 (MBC) 김재철 사장과 이명박 대통령은 달랐다. 무슨 양파도 아니고 까도 까도 온갖 비리가 계속해서 나오는데, 눈도 깜짝 안 했다."(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 128쪽)


최근 출간된 <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 김민식, 푸른숲, 2020>를 읽으면서 잠시 기억이 희미해져 버릴 뻔한 시절을 떠올렸다. 지금 코로나 19로 일상이 무너지자 보통의 평온한 날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듯, 그때 시절이 그랬다. 특히 언론 탄압은 말로 다 못했던 때. 하도 방송이 무슨 5 공화국 시대도 아니고 대놓고 어이없이 돌아가니까 국민들은 공영방송에 등을 돌리게 되고 '나꼼수' 같은 팟캐스트로 언론의 중심이 옮겨가고 있었다. MBC, KBS 뉴스는 기레기(기자+쓰레기) 방송이라며 조롱받았다. 공영방송 파업 소식은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했다. 어차피 공영방송에 대한 기대나 애정이 사람들 마음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당시 공영 방송에 몸담고 있던 이들은 괴로웠을 테고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다. 싸울 것이냐, 부역자가 될 것이냐. 이 책은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그들에 대해 무심했던 사이, 방송 정상화를 위해 개인적 희생을 감수하며 싸운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던 날들이었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독서마저 두려워 지는 일상.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았던. 그 때 그 시절과 묘하게 닮았다.


예능 드라마 PD, 색다르게 유명해진 사연


저자 김민식 PD는 ‘뉴 논스톱(200~2002)’과 ‘내조의 여왕(2009)’을 히트시킨 예능감 넘치는 PD다. 그런데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것은 ‘MBC 프리덤’이라는 노조 영상과 ‘김장겸은 물러가라’라는 1인 라이브 방송이다. 어쩌다 예능PD는 직원들과 뮤비를 만들고 1인 투쟁 방송을 찍게 되었을까?

'방송 만들어서 시청자들을 재미나게 해 주는 일이 최고의 공익(45쪽)'이라 여기며 파업이나 노조에 관심 없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 어쩌다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노조 부위원장 직을 맡게 되면서 인생이 180도  변하게 된다. 드라마 제작에 차질이 생기는 게 싫어 처음에는 어떻게든 파업을 막아보자 했다. 하지만 최승호 PD, 이용마, 박성제 기자와 같은 분들의 헌신된 삶에 영향을 받으며 점점 개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눈떠가게 된다.

예능 피디답게 이왕 하는 싸움 재밌게 하자며 '굿판'도 벌이고 'MBC 프리덤'이라는 뮤직비디오도 만들고 'MB 낙하산 김재철은 퇴진하라'는 구호를 등에 달고 마라톤에 참가하기도 한다. 그러다 검사한테 불려 가 영장 심사도 받는 등 수모를 겪는다.

이후 그의 PD로서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윗선에 찍힌 대가로  제작 일선에 배제된 채 방송 송출 부서로 옮겨진다. (그에게 그것이 더욱 끔찍한 형벌인 것은 정권에 부역하는 뉴스를 강제 시청해야 하는 업무였기 때문이었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티고 버틴 그에게 2017년이 온다. '정윤회' 아들을 캐스팅하라는 윗선의 부당한 지시를 공론화하게 되면서 그는 MBC의 공공의 적이 된다. 그러나 물러나지 않는다. PD정신을 살려 그는 MBC 사옥에서  '김장겸은 물러가라'는 1인 투쟁 퍼포먼스를 라이브 방송으로 중계하며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의 투쟁기는 최승호 PD의 영화  <공범자들>에 기록된다. 영화 <공범자들>의 개봉으로 공영방송 정상화를 향한 국민들의 심이 높아진다. 여론의 힘을 업고  MBC 파업이 재개되며 결국 김장겸 사장 해임되어 물러난다.


지는 싸움을 계속한 이유


2015년, 주조정실 엠디로 발령이 났다... 주조정실은 유배지 중에서도 'A급 전범'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266쪽)


그토록 신나게 프로그램을 만들며 행복했던 피디가 작품 제작에서 손을 놓아야 하는 상황은 견디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친한 선배를 통해 JTBC로의 이적을 권유받았을 때 그저 웃음으로 넘긴다. 그가 저 지경이 된 MBC에서 끝까지 버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게 드라마 피디라는 업을 빼앗고 유배지로 나를 쫓아낸 사람이 MBC 사장이 됐을 때 느꼈다. 운명이 내 멱살을 흔들고 패대기쳤다고. "이제 어떡할 거야? 도망갈 거야?" 그 순간 달아났다면,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부끄러운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중략)
싸움의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은 나를 죽이는 일이다.(202쪽)


2012년 파업 이후 그는 계속 지는 싸움을 반복해 왔다. 그렇지만 싸워야 할 때 싸우는 법을 배웠고 버텼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악의 평범성


이렇게 지는 싸움을 계속 해온 사람들이 있는 반면  파업으로 비어있던 자리를 꿰차며 승승장구한 무리도 있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이히만'이라는 나치 동조자를 재판하는 과정에서 피고 아이히만의  '나는 무고하다'는 태도를 보며 저자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악'을 분석, 통찰한 책이다. 아이히만은 매우 평범한 사람으로 무슨 일을 맡든 의무를 다하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치의 사상에 동조한다거나 악의를 가지고 일 하지 않았기에 스스로 억울해했다. 그렇다면 아이히만, 그의 죄는 무엇일까?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죄를 '타인에 대한 배려가 결여된 생각의 무능'으로 설명했다.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악이다'
 -한나 아렌트-


MBC 파업 때 보여준 노동자들의 각기 다른 선택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 한 사람들로 가득했다면 오늘날 우리 방송은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비단 방송뿐일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 지금 우리가 즐겁게 누리는 많은 것들이 실은 '악의 평범성'을 거부하며 타인과 연대한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무능하고 평범한 악인이 되지 않기 위하여


개인이 가치 판단의 기로에 놓여 행동을 선택해야 할 때 무능하고 평범한 악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부지런히 검열해야 한다.


1. 현실을 넓은 틀에서 보고 있는가?


앞서 보았듯 김민식PD에게는 원래 드라마 제작에 대한 열정이 파업 동참의 이유보다 더 컸었다. 그러나 그는 "당신들의 소임이 방송인데, 왜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냐?"는 질문에 "상한 음식인 줄 알면서도 계속 만드는 게 요리사의 책임인가요?(120쪽)"라고 답하는 사람이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기까지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

제작 자율성이 보장되는 조직문화 덕분에 MBC는 숱한 특종을 내고, 인기 프로그램을 양산했다. 그 덕분에 국민들에게 사랑받고 신뢰받는 방송이 될 수 있었다. 연출로서 나의 행복의 근원이기도 했던 제작 자율성은 사실 과거 MBC 노조 선배들이 군부독재와 피 흘리며 싸워 얻어낸 공정방송의 결실이다. (91쪽)

악의 평범한 동조자에서 벗어나는 길은 자신만의 좁은 틀에 갇힌 현실 인식에서 벗어날 때 가능하다. 내 행위가 미치는 결과의 범위를 '타인'에게로 확장하는 것이다.


2. 개인의 이익과 타인에 대한 배려가 충돌할 때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김민식 PD는 결국 한 창 전성기 때 부당한 인사 발령으로 활동을 제지받게 된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드라마 연출의 전성기는 40대다. 한창 일해야 할 나이에 쫓겨났다. 나이 쉰을 넘겨 복귀했지만, 이제는 드라마 감독으로서 경쟁력이 떨어진다. 드라마 피디는 시청자 동향에 민감한 직업이다. 매년 새로운 작가와 배우가 쏟아진다. 변방에서 산 7년 동안 연출 감각도 시장 감각도 다 잃었다. (280쪽)


투쟁의 끝에 다시 정상화를 이루어 냈지만 세월이 흘러 이제 많은 것이 달라져 버렸다. 그는 자신이 중심적 자리를 차지했을 때 혹시나 과거'한 많은' 선배들(제작 일선에서 물러나 인정받지 못한 한을 품은 선배들 중 후에 보직에 올라 그 못한 한을 풀려 후배를 부당하게 괴롭히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이 그랬던 것처럼 괴물이 될 것을 우려한다. 그리고 후배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길을 내어주겠다는 선택을 한다.

드라마 피디로서 전성기가 이미 끝난 나와 달리 임채원과 서정문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연출로서 기량을 꽃피우고 MBC에 부활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역할은, 드라마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회사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회사를 바꾸는 일이 아닐까?... 내가 꼭 무엇이 되어야, 혹은 무엇을 해야 MBC가 좋아지는 게 아니다. 후배들이 마음껏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길을 내어 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이들이 MBC의 희망이다. 나에게는 개인적인 소명이 따로 있다. 재주 많고 역량 있는 후배들을 가로막는 괴물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위해 꾸준히 책을 읽고 글을 쓴다. (280쪽)


승리의 열매를 후배들에게 양보하는 장면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조직과 드라마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만큼 쉬운 선택이 아니었을 것이다.


3. 내 선택은 자의에 의한 것인가, 타의에 의한 것인가?


아무리 좋은 선택이라 할 지라도 그것이 자발적 동기가 아니라면 오래갈 수 없다. 김민식 PD가 힘든 기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싸워 남는 자가 이기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영화(레미제라블)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장면이 있다. 장 발장이 바리케이드 학살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니, 마리우스를 살리기 위해 하수도를 걸어가는 장면이다. 파리 시민들의 배설물로 가득한 하수도를 허우적거리며 헤쳐나가는 장 발장의 모습. 나는 그 장면이 앞으로 내가 인생을 살아야 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똥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서 이 깜깜한 수로의 끝까지 가본 사람만이 빛을 만날 테니까.'(127쪽)


앞서 보았듯 처음에는 파업에 대해 미온적 태도를 취했었으나 점차 자신만의 파업 스타일(?)을 장착하며 저항의 중심에 서게 된다. 만약 분위기에 이끌려 참여했거나 생각 없이 동조했다면 이렇게 끈질기게 투쟁을 지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사장님, 어금니 꽉 깨무세요.' 등의 남다른 구호와 방식 등 상투성에서 벗어난 참신함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의지에서 비롯된 행동은 끈기의 원동력일 뿐 아니라 투쟁에서 마저 자기 다움을 빛나게 한다.


삶이 예능이요, 드라마다


"오, 말해줘. 왜 나를 내쫓았는지. 사장님은 왜 아직도 안 나가고 버티는지."


'적들에게는 괴로움을, 우리 편에게는 즐거움을!(238쪽)'을 모토로 매주 집회에서 이렇게 노래를 개사하며 새로운 공연을 했다. 오래 버티며 싸우기 위해 '재미'있는 방식을 선택한다.

내가 좋아하는 코미디 영화 가운데 최고의 장면은 <인생은 아름다워> 마지막 장면이다. 아들 조슈아를 살리기 위해 나치 수용소 생활을 숨바꼭질 놀이로 바꿔버린 (주인공) 귀도는 마지막에 숨은 아들이 보는 앞에서 독일 병사에게 끌려간다. 잡혀가는 아빠를 보고 숨바꼭질에서 이겼다는 생각에 아이는 환하게 웃고, 귀도 역시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화답하는데, 그걸 보는 관객은 눈물을 참기 힘들다. 예전에 <유태인의 유머>라는 책을 읽었는데, 상당수가 나치 수용소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더라.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유머 감각을 갈고닦았나 보다. (147쪽)


김민식 의 PD재능은 운명의 장난(?) 덕분에 정규 방송보다는 투쟁 방송이라는 장르에서 빛을 발하였다. 자신을 타고난 딴따라라고 표현하는 PD답게 그의 PD로서의 생명줄을 자르려는 세력에 굴하지 않았다. 삶으로 예능을 찍고 드라마를 찍었다. 우리들은 모두 자신의 삶을 연출하는 인생 PD라고 할 수 있다. 인생 자체가 히트작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게 아닐까.


마치며


책을 읽고 지금 나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또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 돌아본다. 살면서 누구나 자신의 삶 또는 세상과 화해하기 위해 좋든 싫든 싸워야 할 때가 있다. 행여 지금 지고 있을 지라도 옳은 것이라면 계속 나아가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는 전염병과 일대 전투를 벌이고 있다. <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 는 어둠의 시기를 헤쳐나가는 비법을 보여준다. 책을 읽고 생각했다. 도망치지 않고 싸우기로 했다면 이왕 싸우는 거 "즐겁고 독특하고 당돌하게!" 싸워보자. 혹시나 이 기간이 길어질 지라도 긍정과 연대의 힘으로 결코 좌절하거나 엎어지지 말아야겠다고 말이다.


#푸른숲 #김민식 #나는_질_때마다_이기는_법을_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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