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식, <나는 질 때마다 이기는 법을 배웠다>, 푸른숲, 2020
2015년, 주조정실 엠디로 발령이 났다... 주조정실은 유배지 중에서도 'A급 전범'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266쪽)
내게 드라마 피디라는 업을 빼앗고 유배지로 나를 쫓아낸 사람이 MBC 사장이 됐을 때 느꼈다. 운명이 내 멱살을 흔들고 패대기쳤다고. "이제 어떡할 거야? 도망갈 거야?" 그 순간 달아났다면,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부끄러운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중략)
싸움의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이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은 나를 죽이는 일이다.(202쪽)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무능력은 악이다'
-한나 아렌트-
제작 자율성이 보장되는 조직문화 덕분에 MBC는 숱한 특종을 내고, 인기 프로그램을 양산했다. 그 덕분에 국민들에게 사랑받고 신뢰받는 방송이 될 수 있었다. 연출로서 나의 행복의 근원이기도 했던 제작 자율성은 사실 과거 MBC 노조 선배들이 군부독재와 피 흘리며 싸워 얻어낸 공정방송의 결실이다. (91쪽)
드라마 연출의 전성기는 40대다. 한창 일해야 할 나이에 쫓겨났다. 나이 쉰을 넘겨 복귀했지만, 이제는 드라마 감독으로서 경쟁력이 떨어진다. 드라마 피디는 시청자 동향에 민감한 직업이다. 매년 새로운 작가와 배우가 쏟아진다. 변방에서 산 7년 동안 연출 감각도 시장 감각도 다 잃었다. (280쪽)
드라마 피디로서 전성기가 이미 끝난 나와 달리 임채원과 서정문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연출로서 기량을 꽃피우고 MBC에 부활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역할은, 드라마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회사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도록 회사를 바꾸는 일이 아닐까?... 내가 꼭 무엇이 되어야, 혹은 무엇을 해야 MBC가 좋아지는 게 아니다. 후배들이 마음껏 즐겁게 일할 수 있도록 길을 내어 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이들이 MBC의 희망이다. 나에게는 개인적인 소명이 따로 있다. 재주 많고 역량 있는 후배들을 가로막는 괴물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걸 위해 꾸준히 책을 읽고 글을 쓴다. (280쪽)
영화(레미제라블)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장면이 있다. 장 발장이 바리케이드 학살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니, 마리우스를 살리기 위해 하수도를 걸어가는 장면이다. 파리 시민들의 배설물로 가득한 하수도를 허우적거리며 헤쳐나가는 장 발장의 모습. 나는 그 장면이 앞으로 내가 인생을 살아야 하는 자세라고 생각한다.'똥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서 이 깜깜한 수로의 끝까지 가본 사람만이 빛을 만날 테니까.'(127쪽)
내가 좋아하는 코미디 영화 가운데 최고의 장면은 <인생은 아름다워> 마지막 장면이다. 아들 조슈아를 살리기 위해 나치 수용소 생활을 숨바꼭질 놀이로 바꿔버린 (주인공) 귀도는 마지막에 숨은 아들이 보는 앞에서 독일 병사에게 끌려간다. 잡혀가는 아빠를 보고 숨바꼭질에서 이겼다는 생각에 아이는 환하게 웃고, 귀도 역시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화답하는데, 그걸 보는 관객은 눈물을 참기 힘들다. 예전에 <유태인의 유머>라는 책을 읽었는데, 상당수가 나치 수용소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더라.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유머 감각을 갈고닦았나 보다. (1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