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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볕 Oct 13. 2022

삶, 끝이 있어서 더 아름다운 이야기

소설 <작별인사>를 읽고


언제부터였을까. 죽음이라는 단어를 부쩍 자주 떠올리기 시작한 때가. 아마도 40대 중반을 넘기면서부터였을 것이다. 거울 앞에 설 때마다 매일 조금씩 더해가는 세월의 흔적이 보여 당황스러웠다. 외모뿐만 아니라 소화력이 떨어져서 예전만큼 음식을 먹을 수 없었고, 하루에 커피 두세 잔쯤은 거뜬히 마시던 내가 카페인 민감 체질로 바뀌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게다가 술, 밀가루 음식, 새벽 독서 등 그동안 즐기던 모든 것들에 제약이 생겼다. 늙어가는 육신이 예전만큼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탓이었다.


돌이켜보면  때부터  죽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던 아이였다. 위인전을 읽을 때면 인물의 업적이나 생애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이들은 왜 태어나서 살다가 죽어야 했을까, 라는 쪽으로 생각이 흐르곤 했다. 물론 이런 질문을 하면 엉뚱한 데 관심을 둔다고 어른들한테 혼날 것이 뻔하니 속으로만 그런 생각들을 품곤 했다. 그때 내가 떠올린 죽음이 막연한 두려움이나 호기심에 가까웠다면, 요즘 들어 느끼는 죽음은 좀 더 구체적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걸 느낀다. 운동과 각종 영양제 섭취와 병원 치료로 늦춰보려 안간힘을 쓰겠지만 내 육신이 기능을 다하다가 결국 언젠가 멎는 순간이 온다는 것.  사실이 좀 더 생생하게 다가오는 나이가 되었다.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노인 분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고, 저분들도 이런 내면의 소용돌이를 겪고 나이에 이르렀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서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으로서의 동질감과 측은지심이 느껴진다.  


그래서였을까. 지난 5월, 김영하 작가의 신작 <작별인사>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당시 우울과 무기력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내게   외면하고 싶은 주제를 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궁금했다. 국내외적으로 인정받는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는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한동안 무기력하게 내다 취미 모임에 참석하면서 차츰 사람들로 인해 변화하게 된 나는 다시 책을 손에 잡게 되었고, 미뤄두었던 이 책도 드디어 읽게 되었다.




<작별인사>는 멀지 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소설이다. 주인공인 철이의 성장 스토리를 통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삶과 죽음, 존재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철이는 인공지능 로봇을 생산하는 기업의 연구원인 아버지와 안락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무등록 휴머노이드 단속에 걸려 수용소로 끌려가게 된다. 그곳에서 또래인 선이와 민이를 만나 서로 의지하면서 험난한 수용소 생활을 견디어 나간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인간과 거의 흡사하게 만들어진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그러다 민병대의 기습으로 수용소가 파괴된 틈을 타서 탈출한 모든 개체의 의식을 하나로 모으려는 달마를 만난다. 그를 통해 자신이 인공지능 로봇이라는 의심이 사실로 확인되자 철이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린다. 다시 아버지를 만나지만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또 다른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인물들은 격랑에 휘말리게 된다.


작가는 삶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을 선이와 달마의 사생관을 통해 보여준다. 둘은 민병대의 기습으로 파괴된 휴머노이드 민이를 되살리는 문제를 놓고 대립한다. 선이는 민이가 주어진 생을 다 마치지 못했으니 다시 살려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달마는 민이를 다시 살리면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될 수도 있으니 그냥 두는 편이 낫다고 반박한다. 둘은 개별적 의식이 하나의 상위 의식으로 통합된다고 보는 점에서는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연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선이는 인간이든, 휴머노이드든 의식과 감정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는 궁극에는 우주를 지배하는 정신으로 통합될 것이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세상에 만연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면서 각자의 삶의 이야기를 완성해야 한다고 본다. 반면 달마는 모든 의식을 가진 존재는 태어나지 않는 것이 최선이고, 일단 태어난 의식은 모두 절대 의식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달마는 삶을 고해라고 보는 입장이고 선이는 개별적 의식을 지닌 존재로 태어나는 것을  행운이라고 보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민이를 되살리는 문제에 있어선 내겐 달마의 주장이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가 삶을 다 마치지 못한 건 안타깝지만 어쩌면 삶이 거기까지 예정되어있던 것일 수도 있고, 또 불행하게 살다 간 아이를 다시 살려서 고통스러울지도 모르는 인생을 다시 끝마치라고 하는 건 살아남은 자들의 이기심일 수도 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이 아닌, 보통의 자체를 놓고 본다면 태어난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선이의 주장에 동조하게 된다. 안 태어나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던져져 있으니 어찌 되었건 마무리는 좋게 해야 하지 않을까.


책은 또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관해서도 묻는다. 인공지능이 점점 진보하면 결국 언젠가는 인간의 지능을 넘어서는 특이점이 올 테고 그때 인간을 다른 지적 존재들과 구분 짓는 특징이 무엇일지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내 생각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건 불완전성 같다. 우리는 소멸하는 육신을 가진 존재이고, 감정에 쉽게 휘둘리며 어리석고 비이성적인 행동을 자주 일삼는다. 게다가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몸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음식을 섭취해야 하고 냄새나는 배설물도 내보내야 한다. 인공지능 로봇에  비하면 훨씬 관리하기 힘든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폭력적으로 돌변할 수 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읽으면서 인간이 이 행성의 주인이 되기 위해  다른 동물들과 인간종에게 저지른 만행을 보며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어쩌면 이렇게 불완전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선이의 말처럼 주어진 생 동안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노력하면서 더 나은 존재가 되어야 하기 때문은 아닐까.


다시 이 글의 서두로 돌아가 보자. 노화와 죽음.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죽음을 피하려 한다. 그래서 기술문명의 발달과 맞물려 영생을 누리려는 많은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미래학자이자 인공지능 연구자인 레이 커즈와일은 그의 저서 <특이점이 온다>에서 인류는 2045년이면 나노공학, 로봇공학, 생명공학의 발달 덕분에 영생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그때까지 살아남기 위해 엄격한 식단관리와 운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신은 영생을 원하는가?


철이의 아버지인 최박사는 육신이 없는 삶이란 끝없는 지루함이며 참된 고통이고, 인간의 존엄성은 죽음을 직시하는데서 온다고 말한다. 철이 역시 영생이 가능한 인공지능 네트워크를 벗어나 거추장스럽기 그지없는 육신을 다시 입는다. 자유로운 의식으로 떠돌며 살다 오랜만에 얼굴을 핥고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차가운 물의 짜릿함 같은 날 것의 감각을 느끼며 행복해한다.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에도 생존을 선택하려는 본능을 거스르며 인공지능 네트워크로 돌아가는 길을 포기하고 스스로 죽음을 맞는다. 그에게는 기계 지능의 일부로 통합되어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 더 이상 묻지 않아도 되는 삶은 곧 죽음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나와 인연을 맺었던 존재들은 빠짐없이 이미 우주의 일부로 돌아갔다.  우주는 생명을 만들고 생명은 의식을 창조하고 의식은 영속한다. 선이가 늘 하던 이 말을 믿고 싶어지는 순간이다. 파랗기만 하던 하늘이 서서히 오렌지빛으로 물들고 있다. 노을이 진하니 내일은 맑을 것 같다. 그리고 난 그 내일을 보지 못할 것이다. 석양이 기세를 잃고 이제 검고 어두운 기운이 하늘 한가운데서부터 점점 넓게 번져가며 거칠고 누른 땅을 덮기 시작한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보고 있다고 믿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끈질기게 붙어있던 나의 의식이 드디어 나를 떠나간다.

p.285



책을 덮고 나니 먹먹한 여운이 남는다. 이 책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인간과 휴머노이드를 구분 짓기보다는 의식이 있는 모든 존재를 하나로 보고, 우리 모두는 탄생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나는 한 편의 이야기이므로 짧은 생 동안 최선을 다해 그 이야기를 완성해야 한다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문득 내가 브런치 활동 초기에 썼던 글이 떠올랐다. '산다는 것에 관한 고찰'이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은 기억이 난다.


인간의 사유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 단지 생물학적인 수정 작용이 아닌 - 어떤 우주의 섭리에 의해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본다. 저마다의 시간이 주어졌고 인생의 시계는 매 순간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다. 일상이 힘들고 고달플 때 '왜 태어나서 이 고생일까'라고 한탄하기보다는 자신의 세계를 최대한 아름답게 가꿔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삶은 우리의 영혼이 성숙해지기 위한 과정이고 세상은 그런 과정을 겪어내는 시험의 장이라 여겨진다.


두서없이 뒤죽박죽이던 생각들이 당시 글을 쓰며 정리가 되어 그때 이후로 나름의 사생관이 확립된 셈인데  책 속 선이의 사생관과 비슷해서 반가운  마음이 든다.






망설이다 읽은 책이지만 좋았다. 그 시기가 생명의 환희가 넘치는 봄이 아니라, 길거리에 낙엽이 뒹구는 스산한 계절이라 더 좋았다. 책을 읽고 난 여운이 한동안 지속될 것 같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진다. 내게는 얼마의 시간이 남았을까. 레이 커즈와일의 말대로 2045년에 인류가 영생을 누리는 것이 가능해진다면 그때 70세인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지금의 생각대로라면 선이처럼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며 살다가 마지막 순간을 맞고 싶다. 영생을 누리는 대신 "그동안 애썼어."라고 나에게 말하며 홀가분하게 세상과 작별하고 싶다. 하지만 그 작별은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끝이 있어서 아름답고, 이곳에서의 끝은 또 다른 곳에서의 시작과 맞닿아 있어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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