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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볕 Nov 10. 2022

프랑스 어머니라고 다르지 않아요

솔직함과 보편성이 불러일으키는 감동


처음엔 책 표지가 눈길을 끌었어요. 입술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긴 금발 여성의 사진이었어요. 흑백 영화 포스터 같기도 한 그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니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이라는 문구가 보이길래 호기심이 생겨 읽기 시작했어요. 그런도통 속도가 붙지 않았어요. 개인적으로 문학적 서정성이 짙은 작품을 좋아하는데 이 책은 그런 수사학적 기교를 배제한, 조하고 날카로운 문장들이 가득해서 중간에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들었거든요. 그래도 꾸역꾸역 다 읽은 건 수많은 북리뷰어들이 추천하는 책이기도 하고, 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타이틀 때문이었어요. 장애물처럼 버티고 있는 문장들 넘어서면 사람들이 공감하는 지점에 가 으리라 생각했거든요.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느냐고요? 네, 그래요. 다행히도. 마음에 꽉 찬 이 감정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놓으면 좋을까요. ... 일단 책의 첫머리로 가볼게요.


이 책은 프랑스 작가인 아니 에르노가 자신의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장례식에 참석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해요. 장례를 마치고 감정의 격랑이 어느 정도 잦아들 무렵, 작가는 '노르망디 소도시 촌구석에서 태어나서 파리 외곽 지역의 노인병 전문 의료센터에서 치매로 죽음을 맞이한, 난폭했고, 전부를 다 불살랐던 한 여인'의 삶을 조명하며 글을 써 내려갑니다.


어머니는 1906년 이브토라는 소도시에서 농가의 짐수레꾼이었던 외할아버지와 집에서 직물을 짜던 외할머니 사이에서 여섯 아이 중 넷째로 태어나.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12살에 학교를 중단하고 마가린 공장, 밧줄 제조 공장을 전전하며 생활비를 벌어야 했죠. 하류층 노동자라는 자신의 처지에 저항감을 느꼈던 그녀 결혼을 통해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자식에게는 양질의 교육을 통해 상위 계층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거친 언사와 폭력을 일삼는 모습도 보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 한없는 애정과 헌신을 베푸는 모순적인 행동 반복하죠.


그녀는 나를 고얀 년, 더런 년, 망할 년, 혹은 그저 <불쾌한 계집애>라고 불렀다. 척하면 나를 때렸다. 특히 따귀를 때렸고, 가끔은 어깨에 주먹질도 했다.(「내가 참지 않았으면 쟨 벌써 죽었어!」). 그러고 나서 5분 뒤엔 나를 꼭 껴안았으니, 나는 그녀의 <인형>이었다. (중략)  어머니는 나를 치과 전문의, 기관지 전문의에게 데려갔고, 내게 좋은 신발과 따뜻한 옷, 선생님이 요구하는 학용품 전부(그녀는 나를 읍내 공립학교가 아니라 사립 기숙학교에 집어넣었다)를 신경 써서 갖춰 줬다. 가령 내가 반 친구 한 명이 깨지지 않는 칠판을 갖고 있다고 얘기하면, 어머니는 즉각 그게 갖고 싶은지 물었다. 「네가 다른 애들에 비해 넉넉하지 못하다고 입에 오르내리는 건 싫어.」 그녀의 가장 깊은 욕망은 자신이 누리지 못했던 것 전부를 내게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다는 것은 결국 그녀에게는 과중한 노동, 극심한 돈 걱정을 의미하는 거였다.

- <한 여자> 중에서


난폭하지만 어린 자신의 눈에는 한없이 아름답게만 보였던 어머니를 아니 에르노찬미했어요. 움에 대한 욕구가 크고 독서, 시, 루앙 찻집의 케이크 등을 공유할 수 있었던 어머니와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점점 머리가 굵어지면서 자신이 속한 세계와 부모의 세계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고 갈등하게 됩니다.


그녀는 더 이상 나의 모델이 아니었다. 나는 「레코 드 라 모드」를 넘기면 만나게 되는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민감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프티부르주아인 학급 친구들의 어머니들은 그러한 여성적 이미지에 가까워서 날씬하고, 행동이 점잖고, 요리를 잘하고, 자신들의 딸을 다정하게 <사랑하는 딸>이라고 불렀다. 내 어머니는 너무 요란스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가 다리 사이에 병을 끼고서 병마개를 딸 때면 눈길을 돌려 버렸다. 나는 그녀가 말하고 행동하는 거친 방식이 부끄러웠는데, 내가 얼마나 그녀와 닮았는지 느끼고 있는 만큼 더더욱 생생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다른 세계로 옮겨 가고 있는 나는 내가 더 이상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이 여전히 내 모습인 것에 대해서 어머니를 원망했다.

- <한 여자> 중에서


작가는 어머니에게서 감추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세계로부터 멀어지기를 꿈꿉니다. 대학에 진학하고 남편을 만나 새로운 가정을 꾸리면서 그녀는 비로소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다른 세계에 정착합니다. 그곳은 그녀가 살아왔던 세계와는 너무도 다른 곳이었죠. 작가는 그 계층의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나의 어머니와 동갑인 남편의 어머니는 여전히 날씬한 몸매에 얼굴에는 윤기가 흘렀고, 손은 말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그녀는 어떤 악보를 가져다줘도 칠 수 있었고, <접대>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실크 블라우스를 걸치고 진주 목걸이를 건 50대 여인, 텔레비전 통속극에서 볼 수 있는 <매력적으로 순진한> 타입의 여자들).

- <한 여자> 중에서


남편의 집안은 모두 대학 교육을 받았고, 교양과 우아함, 그리고 유머를 갖추고 있는 반면 작가의 어머니는 목소리가 크고, 행동이 거칠고, 상위 계층에 대한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딸의 결혼을 앞두고 쫓겨나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고, 사돈에게 멸시당할까 봐 염려합니다.


이런 성향 때문인지 어머니는 자기 자체로는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딸 내외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해주려 하고, '바흐'를 듣고 '르몽드' 신문을 읽는 딸과 사위 집에서 자신만 튀는 존재 같은 불편함과 소외감을 느낍니다. 제대로 돌봄 받지 못하고 자란 한 여인이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는 세계에 속해 버린 자식에게 사랑받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습보면서 마음이 저려왔어요.


말년이라도 편했으면 좋으련만 그 시기는 어머니와 아니 에르노 모두에게 가혹한 시련을 안겨줍니다. 알츠하이머에 걸려 인지 능력을 상실하고, 오줌 때문에 기저귀를 찬 채 손가락으로 게걸스럽게 먹고, 틀니가 빠져서 입술이 다 쪼그라들어버린, 점점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작가는 고뇌에 휩싸입니다.


그녀는 시몬 드 보부아르보다 일주일 앞서 죽었다.
그녀는 받기보다 아무에게나 주기를 좋아했다.
글쓰기도 남에게 주는 하나의 방식이 아닐까.
이것은 전기도, 물론 소설도 아니다. 문학과 사회학, 그리고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리라. 어머니의 열망대로 내가 자리를 옮겨 온 이곳, 말과 관념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스스로의 외로움과 부자연스러움을 덜 느끼자면, 지배당하는 계층에서 태어났고 그 계층에서 탈출하기를 원했던 나의 어머니가 역사가 되어야 했다.

-<한 여자> 중에서


어머니의 일생을 지극히 건조한 문체로 술한 작품이지만 그 속에 담긴 깊은 애정을 엿볼 수 있었어요. 누군가에겐 치부로 여기며 감추고 싶을지도 모를 하류층 출신인 자신과 부모의 삶을 작가는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어요. 끄러움, 굴욕, 고통을 낱낱이 밝히는 글쓰기를 통해 그녀는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개척해왔죠. 스웨덴 한림원에서도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아니 에르노를 선정하면서 "개인적인 기억의 뿌리와 소외, 집단적인 구속을 드러낸 용기와 꾸밈없는 날카로움"을 수상 이유로 들었어요.


프랑스 가족이야기지만 한국의 여느 어머니들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어요. 시대의 격랑에 맞서 강인한 의지로 삶을 일구고 자식을 키운 한 여자의 보편적인 이야기가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책을 덮고 나니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버린 내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르네요. 한때는 자식을 키우며 긍지와 자부심으빛나던 시절을 보낸 한 여인. 


그 여인의 모습을 이 책에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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