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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볕 Apr 13. 2023

태어난 건 운이 좋은 거야


알람 소리에 눈을 떴는데 방이 어둑하다. 햇살 한 자락 보이지 않는 아침.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위협하듯 윙윙거리며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다시 문을 닫는다. 소설 <폭풍의 언덕>의 배경인 영국의 요크셔 지방을 가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일 년 내내 오늘 같은 날씨가 지속되는 곳이지 않을까.


이런 날은 기분이 처지기 십상이라 아침부터 빠른 템포의 음악과 함께 운동을 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일부러 활동량을 늘린다. 땀을 흘린 후에는 기분이 나아지도록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한다. 그런데 오늘은 별 효과가 없다, 이런.



커피 한 잔을 내려 창가에 앉는다. 날씨와 어울리지 않는 밝은 음악이 생뚱맞게 느껴져 습도를 가득 머금은 듯한 느리고 무거운 분위기의 음악으로 바꾼다.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아예 날씨와 혼연일체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사람이 어떻게 맨날 즐거울 수가 있어. 이런 날도 있는 거지.


기분이 좀체 나아지지 않는 것에 대한 자기 합리화를 하며 책을 펴든다. 주말에 읽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을 마저 읽는다. 책 전체가 옮겨 적고 싶은 문장들로 가득하지만 다 적을 수는 없으니 몇 구절만 발췌해 본다.


"따져보면 태어난 것 자체가 엄청난 운을 타고난 거라네. 운 나쁜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해."
-101p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을 고통으로 보는 내게 이어령 교수가 생각을 바꾸도록 충고하는 듯하다. 말기암으로 딸을 먼저 떠나보내고 자신도 고통받고 있는 상황에서 탄생과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삶에 대한 비관론을 내려놓지 못하는 나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인생이 (행운까지는 아니지만) '영적인 성장을 이루는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


"결정된 운이 7이면 내 몫의 3이 있다네. 그 3이 바로 자유의지야. 모든 것이 갖춰진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 그게 설사 어리석음일지라도 그게 인간이 행사한 자유의지라네. 아버지 집에서 지냈으면 편하게 살았을 텐데, 굳이 집을 떠나 고생하고 돌아온 탕자처럼... 어차피 집으로 돌아올 운명일지라도, 떠나기 전의 탕자와 돌아온 후의 탕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네. 그렇게 제 몸을 던져 깨달아야, 잘났거나 못났거나 진짜 자기가 되는 거지. 알겠나?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수만 가지 희비극을 다 겪어야 만족하는 존재라네." - 109, 110p


운명과 자유의지에 대한 쉽고 명쾌한 설명은 '역시'라는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젊을 때는 자유의지를 믿는 편이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운명을 믿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현생은 전생의 복잡한 인과관계로 얽힌 매듭을 풀도록 설계된, 태어나기 전부터 '결정'되어 있는 기회라고 생각된다. 다만 큰 틀 안에서 어느 정도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숙명론, 팔자론으로 풀어버리면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어'로 모든 걸 덮을 수 있네. 가난해도, 실패해도 '팔자' 핑계 대면 그만이거든. 그런데 인생의 마디마다 자기가 책임지지 않고 운명에 책임을 전가하는 건, 고약한 버릇이라네. - 110p


이어령 교수는 운명은 믿되 팔자 탓을 하는 것을 경계한다.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은 존재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대체로 실력대로 가고 있다는 말에 작은 저항감이 일긴하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운이나 팔자 탓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이 책에서 가장 큰 울림으로 다가온 건 바로 아래 질문이었다.


'너 존재했어?'
'너답게 세상에 존재했어?'
'너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 215p


송곳처럼 날카로운 물음에 순간 뒷골이 서늘해진다. 성경에 나오는 '길 잃은 한 마리의 양'과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인용하며 교수는 이들은 저 홀로 낯선 세상과 대면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떼로 몰려다니면서 제 눈앞의 풀만 뜯거나 안락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존재하겠다'라는 일념으로 아버지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갔다 돌아온 존재라고. 길 잃은 양은 자기 자신을 보았고 구름을 보았고 지평선을 보았다는 말이 시처럼 아름답게 다가온다. 남의 뒤통수만 쫓아다니면서 길 잃지 않은 사람과 혼자 길을 찾다 헤매본 사람 중 누가 진짜 자기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이 긴 여운을 남긴다.


비 오는 어둑한 오후, 공허했던 마음이 이어령 교수의 빛나는 통찰이 담긴 조언들로 채워진 것 같다. '낳음 당했다'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삶에 대한 비관적인 시각이 팽배한 요즘, 생의 마지막에서 사력을 다해 쏟아낸 이 현자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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