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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볕 Mar 15. 2023

말기 암환자가 만든 자신만의 '스위트 홈'

소설 <홈 스위트 홈>을 읽고


오랜만에 들른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언젠가 블로그 이웃 피드에서 스치듯 본 기억이 떠올라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홈 스위트 홈. 올해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말기암에 걸린 주인공이 시골 폐가를 수리해 자신만의 스위트 홈을 완성하고 그곳에서 새로운 희망을 꿈꾸는 내용을 담고 있다.


기억 속 최초의 집에는 우물이 있었다. (중략) 비가 그친 어느 날에는 툇마루에 청개구리가 나타났다. 당시 두어 살이던 내 손바닥보다 작고 깨끗해 보이던 연두색 생명체. 나는 손을 뻗었고 청개구리는 폴짝폴짝 뛰어 사라져 버렸다. 나는 울었다. 왜 울었을까? 그때 내가 운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나조차 잊어서 영영 모를 것이 되었다. 그런 일들에 대해 요즘 자주 생각한다. 분명 일어났으나 아무도 모르는 일들. 기억하는 유일한 존재와 함께 사라져 버리는 무수한 순간들. -13p


글의 첫머리에서 주인공인 '나'는 기억 속 최초의 집을 떠올린다. 우물과 흙바닥으로 된 마당이 있고 지붕에는 검은 기와가 얹힌, 그리고 우물의 돌덩이에는 초록색 이끼가 끼어 있고 댓돌과 흙바닥 틈새에 노란 민들레가 피어 있던 집. 비가 그친 어느 날 나타났던 청개구리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폴짝폴짝 뛰어 사라져 버린 작은 생명체를 보며 울던 기억.


나 역시 어린 시절의 집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뒤편에 넓은 야외 베란다가 딸린 주택이었는데 된장, 고추장, 간장을 담은 장독들이 사이좋게 머리를 맞댄 채 놓여있었고 엄마가 키우시던 방울토마토, 고추 등이 심긴 화분들도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심심할 때면 베란다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아득히 높게 떠가는 비행기를 바라보던 유년의 날. 월이 흘러도 집에 관련된 이런 장면들은 뇌리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오래도록 남아 있다. 


그림은 단순했다. 기역자 형태의 단층 주택. 본채는 기차의 객실처럼 침실, 거실, 주방이 나란히 이어진다. 침실과 거실 앞에 툇마루가 있고  주방 앞에는 댓돌이 있다. (중략) 거실 앞의 툇마루를 가리키며 말했다.
비 오는 날 여기에 앉아 부추전을 만들어 먹었어. 텃밭을 가리키며 이어 말했다. 이 텃밭에서 부추를 가위로 잘라 와서.
어진이 물었다. 언제?
나는 대답했다. 미래의 어느 여름날.
-28p
잠시 그림을 바라보다 말했다.
나는 이 집에서 죽어.
그 순간, 내 주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미래와 희망을 느꼈다.
그럼 나는?
어진이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나와 같이 여기서 살지.
이 집은 어디에 있어?
완치하리라는 희망보다 훨씬 단단한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이제 우리가 찾아낼 거야.
-29p


암 진단을 받은 '나'는 수술과 항암치료에도 불구하고 재발이 계속되자 가족의 만류를 뿌리치고 병원 치료를 중단한다. 그리고 기억 속의 집을 떠올리며 자신만의 '스위트 홈'을 완성할 계획을 세운다. 집을 그리던 중 '나'는 연인인 어진에게 비 오는 날 부추전을 만들어 먹던 '미래의 어느 여름날의 기억'을 말한다.


미래의 기억. 모순적일 수도 있는 이 말이 꽤 그럴듯하게 들렸다. 과거, 현재, 미래가 순차적으로 펼쳐지는 게 아니라, 시간의 폭발로 사방으로 퍼져나가 멀리 떨어진 채 공존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믿는 '나'는 경험하지 않은 미래를 기억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그렇게 '나'와 어진은 살아본 적 없는 집을 기억하고, 그곳에서 텃밭 작물을 키우고, 정성 들여 만든 음식들을 '먹을' 날들을 회상한다.


나는 육체고 이름이며 누군가의 무엇이다. 그러나 그보다 깊은 영역에서, 나란 존재는 나만이 알고 있는 기억의 합에 더욱 가까웠다. 사람들이 말하는 영혼이란 기억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35p


기억의 합이 존재라는 말에 수긍하게 된다. 특히 집은 우리 삶과 밀접한 공간이라 집에 얽힌 기억은 우리 존재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시골 폐가를 개조하던 중 닳은 지우개, 발목에 앵두 자수가 있는 양말 한 짝, 키를 잰 흔적이 남아 있는 문틀, 야광별 스티커가 붙어 있는 유리창을 발견한 주인공은 전에 살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모두가 떠나고 집은 버려졌어도 거기 흔적이 남아 있었다. 타인의 시간과 기억이 배인 작고 사소한 들을 소중히 보관하며 언젠가 다시 찾으러 올지도 모를 그들을 상상한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자신의 삶에서 행복한 순간들을 바라본다.


또한 나의 천국은 다음과 같은 것. 여름날 땀 흘린 뒤 시원한 찬물 샤워. 겨울날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바라보는 밤하늘. 잠에서 깨었을 때 당신과 맞잡은 손. 마주 보는 눈동자. 같은 곳을 향하는 미소. 다정한 침묵. 책 속의 고독. 비 오는 날 빗소리. 눈 오는 날의 적막. 안개 짙은 날의 음악. 햇살. 노을. 바람. 산책. 앞서 걷는 당신의 뒷모습. 물이 참 달다고 말하는 당신. 실없이 웃는 당신. 나의 천국은 이곳에 있고 그 또한 내가 두고 갈 것.
-37p


주인공이 정의하는 천국은 내가 생각하는 천국과 상당히 닮아 있다. 병이 기적적으로 완치되었는지 아니면 악화되었는결말로는 알 수 없지만, 얼마의 시간이 주어졌그들은 그들이 완성한 '스위트 홈'에서 행복했으리라. 햇살, 노을, 빗소리. 바람을 께 느끼고 다정하게 손을 맞잡은 채 같은 곳을 향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기억의 총합이 존재이고 소한 것들 하나하나에 남겨진 흔적조차도 삶을 완성하는 소중부분으로 보는 작가의 시각이 인상적이었다. 우리 삶은 어쩌면 매일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삶의 끝에서 희망을 꿈꾸는 주인공처럼 세상살이에 지친 몸을 누이고 충분한 쉼과 치유를 통해 매일 새로운 시작과 희망을 꿈꿀 수 길 바라본다. 저마다의 스위트 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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