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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볕 Jan 23. 2024

순대는 추억을 싣고

어느 먹방 유튜버의 선물


순대볶음이 너무너무 먹고 싶었다. 혼술 유튜버가 시장통 가게에서 곱창볶음을 시켜놓고 맛깔나게 소주를 들이켜는 장면을 본 뒤로 순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내일 백순대 먹으러 갈까?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남편이 물었다. 그는 곱창볶음이 먹고 싶은 내장 부위를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 아마도 순대볶음을 먹으러 가자고 한  거다.


근처에 백순대 잘하는 데 있어?


평점 좋은 데 하나 있던데.



먹는 데 진심인 남편은 벌써 식당까지 찾아놨다. 들깻가루와 깻잎이 듬뿍 들어간 백순대볶음을 먹을 생각을 하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순대볶음과의 인연도 꽤 오래되었구나. 우리의 첫 만남은 고등학교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가 다니던 학교 근처엔 유명한 순대타운이 있었다. 비위가 약해 음식을 많이 가리던 나였지만 순대볶음은 의외로 입에 맞아서 친구들과 종종 먹으러 다녔다.


전주집, 목포집 등등 맛의 고장을 상호로 내건 간판들이 즐비한 순대타운의 한 귀퉁이에서 양념장에 찍은 순대를 깻잎에 싸서 부지런히 입으로 가져가던 그 시절이 벌써 삼십 년 전이라니. 쌈을 먹고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시면 시원한 탄산이 휘몰아치며 들깻가루로 텁텁했던 입안을 씻어주어 마치 처음인 것처럼 다시 먹기 시작할 수 있었지.


나이가 들면서 주머니 사정이 나아지자 순대타운으로 향하는 발길이 뜸해졌다. 신혼 때 한 번인가 남편과 추억을 더듬을 겸 갔었는데 예전의 그 맛이 아니어서 실망하곤 그 이후론 찾지 않았. 근데 오물오물 너무 맛있게 곱창볶음을 먹는 그 유튜버의 먹방이 순대볶음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다음날, 식당으로 출발하려는데 먹구름이 가득 드리운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습도가 높은 이런 날엔 입에 와닿는 음식의 풍미가 더 강해지기 마련이다. 대볶음을 먹으러 가기엔 인 날이었다.


우리가 검색한 식당은 대로에 면한 신축건물에 입점해 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곳 같은데 맛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지만 수많은 영수증 리뷰와 높은 평점을 믿어보기로 하고 자리에 앉았다.


백순대볶음 2인분 주세요.



꼬박 하루를 참고 먹으러 온 거라 기대감은 풍선처럼 부풀어있었다. 내 나이 또래로 보이는 남자 사장님은 싹싹하게 주문을 받은 후 주방으로 들어갔다.


탁탁탁탁! 요란하게 야채 써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십여분 후 순대, 곱창, 양배추, 깻잎, 당면 등이 수북이 쌓인 철판이 우리 앞에 놓였다. 익혀 나온 거라 바로 먹으면 된다고 했다.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 양념에 콕 찍은 순대와 들깻가루로 곱게 단장한 야채들을 깻잎에 돌돌 말아 입으로 가져갔다. 혹시나 맛없으면 어쩌지, 했던 우려감이 단번에 날아갔다. 짭짤한 양념과 고소한 들깻가루가 하모니를 이루는 가운데 순대와 채소들이 각기 다른 식감으로 존재감을 뽐냈다. 탱탱한 당면과 쫄깃한 떡까지 있어서 더할 나위 없는 구성이었다.


남편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순대와 함께 나온 곱창을 집어먹고 있었다. 나 때문에 먹고 싶은 걸 못 먹는 것 같아 마음 쓰였는데 이렇게라도 맛보게 되어 다행이다. 비록 소곱창이 아닌 돼지 곱창이긴 하지만.^^


가게 한 편에 있는 스피커에서는 사장님의 취향인지 아니면 메뉴 맞춤형 전략인지는 모르겠으나 90년대~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가요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너에게 난 아픔이란 걸
너를 사랑하면 하면 할수록~



그 시절 남자 선배. 동기들의 노래방 18번이었던 익숙한 멜로디가 순식간에 과거로 데려갔다.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도 친구들과 순대타운을 즐겨 찾았었다. 주머니 가벼운 학생 시절엔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철판요리가 떡볶이와 순대 말고는 없었다. 


순대타운 근처에는 카페, 술집, 노래방이 즐비했는데 우린 밥을 먹은 후 자주 노래방엘 갔다.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며 깔깔대던 그땐 참 흥도 많았었네.^^


그 기억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노래가 부르고 싶어졌다. 남편이 노래방에 가자고 했지만 단둘이 가는 노래방은 별 재미가 없다. 그래서 내 선택은 바로 달리는 노래방~~~ 남 눈치 보지 않아도 되고 층간 소음 걱정도 없는 프라이빗한 노래방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달리는 차 안에서 십 대 시절을 함께 했던 토이의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다.



오래된 추억에 새로운 옷이 한 겹 덧입혀졌다. 앞으로 백순대볶음을 먹을 땐 시절과 함께 오늘의 기억이 떠오르겠지.


어느 혼술 유튜버 덕에 과거의 순간이 현재의 옷을 입고 생생하게 살아났던 날. 이런 재미가 있어서 중년의 삶도 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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